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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1:6-10 복음과 다른 복음 2011. 10. 2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 목적이 없이 행동하는 것을 거름지고 장에 간다고 합니다. 거름을 졌으면 논이나 밭으로 가야하는데 장에는 왜 가는 것입니까? 자기도 모르게 장의 매력에 끌려서 그곳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한번 물어봅시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을 사람들은 교회로 모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모인 것입니까? 우리도 거름을 지고 논이나 밭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잔치를 벌려놓고 손님을 청하니 소를 사서 부려보아야 하고 밭도 샀으니 가 보아야겠다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교회라는 모임에 왔다는 것은 왜 왔습니까? 교회로 오면 여러모로 손해가 많이 납니다. 6일 동안 일했으니 하루는 푹 쉬어야 또 열심히 일하러 갈 수 있는데 새벽부터 오후까지 교회로 오시면 피곤이 풀리지 않아서 손해입니다. 그리고 교회로 오면 헌금도 해야 하니 경제적으로도 손해가 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모입니까? 그러한 희생을 하고서라도 나는 천국에 들어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그러나 교회에 열심히 오신다고 천국 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들여보내 주시는 자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아무리 힘쓰고 애쓰고 달음박질 한다고 천국이 열려지지 않습니다.

 

로마서 9:13-16절입니다.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야곱과 에서나 태어나기도 전에 미움 받을 자와 사랑 받을 자가 결정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원하고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게 됩니다.

 

이 말씀에 여러분은 아멘이 되십니까? 구원이란 우리의 의지와 결단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주의 긍휼을 입어야 하는데 그 긍휼을 입는 것도 하나님의 마음대로입니다. 물론 우리가 볼 때는 하나님 마음대로 이지만 하나님은 창세전의 언약대로 일하시기에 한 치의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여 예수 믿는 자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6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자를 속히 떠나는 것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갈라디아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즉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어찌 그렇게 은혜에서 떠나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앞에서 피를 뿌려 언약을 체결하고서 언약증서를 받아오는 40일 기간에 벌써 금송아지를 섬기는 모습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복음을 받은 자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자 그렇게 쉽게 그렇게 빨리 떠나는 것을 보고서 바울사도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 다른 복음, 저주, 누구를 기쁘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엄청난 주제를 한 제목으로 몇 시간을 해도 부족하지만 대략적인 줄기라도 잡을 수 있도록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먼저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간단한 정리가 오늘 본문 6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데 무엇으로 부르시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복음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또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약의 히브리어로 메시아입니다. 메시아의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성별됨을 말합니다. 그래서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이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장차 오실 참된 기름부음 받을 자인 메시아를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구약 전체가 오실 메시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된 것은 자기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1:10-12 절입니다.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증거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가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증거 하였고 이러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인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복음을 전한 자들도 신약에서 복음을 증거 한 사도들도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까지도 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오직 믿음에서 믿음으로, 은혜에서 은혜로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하여지고 믿게 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결과로 인하여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은 율법에 의하면 저주받아 죽는 죽음입니다(신명기 21:23). 율법을 외우다 시피 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저주받은 죽음으로 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다 돌아섭니다. 빵을 주고 병을 고쳐주었을 때에 그들의 메시아라고 임금을 삼으려고 하였는데 십자가 앞에서는 고개를 돌이질 하면서 침을 뱉고 돌아섰습니다. 그 사랑받던 제자들도 다 배신하고 돌아서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저주가 어떤 저주인지 갈라디아서 3:13-14절을 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저주 받은 죽음이 맞는데 이 저주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이 이방인에게까지 이르게 하고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심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5:17-21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사도들에게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에게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라고 합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죄로 삼으셔서 죄의 결과인 저주와 심판과 사망을 예수님께서 당하심으로 그 안에서만 유일하게 하나님과 화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변개시킬 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이 전하는 것은 예수님을 자신들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믿어서 되는 일이 아니고 율법도 지켜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할례입니다. 이런 것이 그림자인데도 이들은 아직도 율법의 완성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5장에서 사도들의 회의가 있었을 때에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사도행전 15:1-2절을 봅니다.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그 결론은 11절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 믿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내린 복음의 결론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6절을 봅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 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고 합니다. 왜 다른 복음을 이렇게 따를까요? 인간이 범죄 하고 나서 인과율에 빠져버렸습니다. 어려서부터 배운 것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배운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속에 장착이 되어 태어납니다. 은혜가 없는 세상, 오직 나의 행함으로만 살아남는 세상이 지옥인데도 마귀는 이런 지옥을 마치 천국인양 속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창조의 은혜와 구원의 은혜를 떠난 인생들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절대의존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가 너무나 낯설게 여겨지는 세상이기에 주 예수의 은혜로 우리를 불러내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이런 은혜의 복음을 듣고서 다른 복음을 살짝 제시하면 사람들이 그곳으로 혹 하고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할례를 언급하지만 오늘날에는 더 많은 것들로 다른 복음에 들어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떠나게 만드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는 다른 복음은 번영신학입니다. 물신숭배입니다. 이것이 조금 퇴보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신비주의도 한몫을 합니다. 신비한 체험과 기적과 이적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개인과 단체들이 자기들만이 바른 복음이라고 하며 여러 가지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그 표적만이 참으로 표적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십자가에서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저주를 다 받아내시며 동시에 자기 백성들에게 의의 선물이 주어지는 자리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증명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성령을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의 은혜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믿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공로에 자신의 행위를 보태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부족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이런 자들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7-9절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라고 8절과 9절에서 두 번이나 말합니다. 사도 자신도 이 복음을 다르게 전하면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이지만 바울 자신의 복음이 아닙니다. 나의 복음이라고 하였지만 그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기에 자신은 종으로서 그 복음에 메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조차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로 오는 것은 복을 받으려고 왔습니까? 저주를 받으려고 오셨습니까? 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복이 도대체 무슨 복입니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와 사망아래 태어나서 영원한 지옥으로 달려가는 인생입니다. 이것이 저주를 받은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들이 복을 달라고 하는데 그 복이라는 것이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지옥으로 질주하는 인생이 브레이크를 밟아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가속을 붙이게 되는 것을 복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교회라고 모여서 주여! 주여! 라고 부르짖는다면 그것은 지옥으로 더 빨리 달려가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렇게 달려가던 인생들입니다. 아직도 이 방향으로 달려가는 자들이 우리 가운데도 많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주 예수의 은혜로 부르시면 어떻게 됩니까?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차가 내리막길로 달려가는 것을 스스로 멈출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인생을 붙잡아 돌이키시는데 자신의 몸을 던져 차를 멈추었습니다. 그동안 인생의 성공이라고 여기면서 싣고 다니던 모든 것들이 다 전복이 일어납니다. 돈도, 명예도, 자존심도, 자신의 가치도 다 날아 가버리는 그 사고의 현장에 나를 지으신 창조주가 죽어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부닥치는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가 죽을 때 까지 반복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혀 가게 되는 인생을 성도라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합니다. 우리를 이런 세계로 이끌어 가시는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이 좋아하십니까? 아까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는 로마서의 말씀을 보았습니다만 이 말씀은 창세기에서 나오는 말씀이고 이것을 말라기 선지자가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1:1-5절입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면서 대듭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야곱은 죽도록 고생합니다. 하나님의 미움을 받은 에서는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보다 더 부자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병이 318명이지만 에서는 400명입니다. 고생 안하고 부자 되고 강한 성벽을 쌓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야곱은 얼마나 고생을 합니까? 바로 왕 앞에 선 야곱은 자기 나그네 인생이 험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사랑입니까? 에서는 자기의 힘으로 살겠다는 사람입니다. 무너뜨림을 당하여도 다시 쌓으리라고 합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을 백성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이 믿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 털어버리십니다. 얍복강에서 환도 뼈가 위골되어 도망갈 수도 없는 신세입니다.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아들이 음행을 합니다. 사랑하던 라헬은 빨리 죽습니다. 사랑하던 요셉의 죽음도 경험합니다. 이렇게 다 털리고 나서 무엇 하나 붙들게 됩니까? 하나님의 약속, 그 약속을 다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 한분 붙들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좋습니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른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따라갑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은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자꾸만 인간의 행위들을 보태어 다른 복과 다른 가치들은 원하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다른 복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높이고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데 그 저주가 무엇이겠습니까?

 

로마서 9:3절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이 자기 형제를 위하여 저주를 받아도 그들이 돌아온다면 좋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주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저주입니다. 세상의 실패가 저주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 저주받았다고 하는 그런 삶이 저주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저주입니다. 우리가 어떤 환난을 당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뚜렷하게 보여 진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