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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1-10 친교의 악수 2011. 10. 23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지난주에 바울복음의 기원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바울이 받은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아버지께로부터 친히 받은 복음입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이 여기는 사도들에게 전수 받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자신의 복음을 확증 받으러 간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와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3년 만에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잠시 만났기에 사도들에게서 받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에게 자신의 복음을 추인 받을 필요가 없이 바울은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다른 동역 자들과 함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물론 가는 곳마다 먼저 유대인의 회당이 있으면 그곳에서 먼저 복음을 전하였고 배척받으면 이방인에게로 갔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복음전파로 수많은 이방인 지역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음의 열매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의 열매가 나타난 곳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가만히 들어와서는 예수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할례도 행하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만약 할례를 행하게 된다면 다른 율법도 다 지켜야 하기에 바울은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추호도 양보를 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우리가 믿어주는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에 대하여 어떤 오해를 하는가 하면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다는 자기의 행위를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으면 교회에 다닌다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니 교회를 다닌다고 하겠지만 교회 다니는 것 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 하고 다릅니다. 또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으면 어느 교회 집사라고 하고 권사니 장로니 목사라고 합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것은 내가 믿는 것의 결과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믿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8-9절입니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은혜로 믿게 되었기에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가 아니기에 누구든지 자랑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런 저런 행위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을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기에 이런 자는 다른 복음입니다. 또 믿음 더하기 행위로 구원을 이야기해도 다른 복음입니다.

 

로마서 4:13-17절을 봅니다. “봉독”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었다는 말입니까? 17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며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적인 은혜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나의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도저히 자신의 행위를 믿을 수가 없기에 오직 주 예수의 십자가로부터 거저 주시는 은혜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는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아는 자가 믿음의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2:1절입니다. 십 사년 만에 예루살렘에 가면서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갑니다. 바나바는 자기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가져오고 그것으로 구제를 합니다. 그래서 별명을 얻는데 권위자라고 합니다. 권위(權威)자가 아니라 권면하고 위로하는 권위(勸慰)자입니다. 바나바가 예수님을 만난 바울을 다소에서 데리고 와서 안디옥에서 사역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를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디도는 완전한 이방인으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함께 올라간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과 함께 교제를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2:2절입니다. 이렇게 올라간 것은 계시를 따라 올라간 것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도들에게 추인을 받기 위하여 간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하여 올라가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바울이 전한 복음을 제시하게 한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이렇게 하셨는가 하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나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지금까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 복음이 거짓 선생들로 인하여 무효화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 사도들과 같은 복음임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모든 이방인들을 개와 같이 여깁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거 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임하였지만 유대인들은 복음을 예루살렘에만 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납니다. 스데반이 순교하는 그 장면에서 박해 한 자가 지금 바울이라고도 하고 사울이라고도 하는 사람이 교회를 잔멸하려고 예수님을 믿는 남녀를 끌어가다 감옥에 넘깁니다.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흩어져서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흩어진 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사도행전 8:14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말이 사마리아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과 같이 취급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할 때에 앗수르 왕이 혼혈정책을 썼기에 피가 섞인 유대인이라고 개처럼 취급하였습니다. 그런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확인하려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 것입니다. 현장에 가보니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고 성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기도하였더니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이 임하는 것이 다르다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러나 이때 믿는 것과 성령이 임하는 것이 따로 되는 이유는 베드로와 요한으로 하여금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임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확인 작업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다시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들도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고백을 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 회의가 일어납니다. 지금 바나바와 바울과 디도가 예루살렘에 와서 이 문제를 제출한 것입니다. 그 결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얻는 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다시 갈라디아서 2:2절을 봅니다. 계시로 올라와서 유력한 자들에게 복음을 제출한 것은 바울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방인 지역에 복음을 전하여 나타난 그 열매들을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오래된 전통, 아주 어려서부터 골수에 박히도록 익힌 율법의 조건을 충족시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들도 성령이 임하고서도 유대인의 전통대로 살았습니다. 그 정도로 선민의식과 율법의 전통이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때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복음이 얼마나 많이 박해를 받았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3-5절입니다. 그러나 그런 핍박에도 불구하고 헬라인 디도를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한 것은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한다고 합니다. 무슨 종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율법의 종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율법의 종이 되는 것은 반드시 기복적으로 변질됩니다. 율법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계급이 형성되고 상급의 차등이 되는 것이기에 거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의 모습이며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의 후손들의 특징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를 얻은 것이 오직 복음으로 된 것인데 다시 종으로 삼으려고 하기에 한시도 그런 것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가운데 있게 함이라고 합니다.

 

6-8절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인하여 그리스도의 계시로 예루살렘에 왔지만 유력하다는 자들이 내가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다고 합니다. 바울의 복음에 무엇을 첨가할 것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 당시에 예루살렘의 유력하다는 자들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같이 교회의 기둥같이 여기는 자들이지만 바울은 그러한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기 때문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방인인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나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같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할례자의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9절입니다. 그러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고 합니다. 같은 복음임을 확인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친교의 악수입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자신들의 복음만이 옳고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이 틀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도 자신의 복음만 옳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틀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계시로 인하여 올라간 것은 다른 복음이 없다는 것을 확인 한 것입니다. 그 같은 복음이란 사도행전 15:11절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는다고 하고 이것을 확정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한 가지 부탁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하도록 한 것인데 이것은 본래부터 힘쓴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방인 지역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기근이 들었음으로 연보를 하게 합니다. 이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가 받는다면 이방인의 연보를 받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또한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의 유대인 중심의 교회가 교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 예수님을 믿는다는 무엇으로 교제를 하십니까? 한 교회를 다닌다고 교제가 됩니까? 세상의 이야기들로 교제를 하십니까? 정말 복음의 교제가 되고 있습니까? 인간적인 방법과 친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친목단체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이 복음의 진리와 또 복음의 교제가 항상 있습니까? 다른 이상한 것들로 채우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다음 주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루터와 칼뱅으로 연결되는 종교개혁의 모토가 무엇입니까? 오직 은혜입니다. 인간의 공로사상이 팽배한 가톨릭에서 개혁한 이유가 오직 은혜로입니다. 다른 말로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물론 이런 바탕은 오직 성경입니다. 사람들이 가르침과 전통이나 교황의 가르침이 아니라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개혁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이 오직 복음 외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추가가 되어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이 얼마나 많이 증거 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에 의한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교회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예수님이 살아서 자기 피로 값을 주고 만들어 내시는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 교회로 부름 받은 자들은 자신의 의가 일체 없으며 자신의 죄인 중의 괴수인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 받은 자라고 고백하며 친교의 악수를 하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