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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11-16 의롭게 되는 것은 2011. 10. 30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사람이 의롭지 않으면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상 의롭지 아니한 자에게는 진노가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18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는데도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마귀에게 속고 있는데도 속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기에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더 많이 소유하려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진노를 차곡차곡 쌓아 가는데도 그것을 성공이라고 하면서 달려갑니다.

 

세상이 그러하다면 교회는 그런 것이 성공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 세상의 가치관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은 하면서도 그 결과로 무엇을 받는다고 합니까? 세상의 성공이나 번영을 이야기한다면 이것 역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로마서 2:4-5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의롭지 아니한 자들에게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의로워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의롭게 되는 것입니까?

 

신명기 6:25절입니다.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명령대로 행하면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어 살게 되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결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부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율법을 다 지켰기에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한 자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사실에서 이들의 가진 의란 온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신 것은 이미 범죄 한 아담의 후손들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됨으로 인간이 죄 아래 갇혔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오기전이 먼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아브라함이 먼저 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의 의의 개념은 어떤 것입니까? 흔히 말하는 양심입니다. 양심을 가지고 자기를 저울질 하면서 삽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의 기능을 양심이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선이냐 악이냐를 자기의 양심에 비추어 저울질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양심이라는 것도 그 사람이 처한 환경과 가치관의 영향을 받지만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폭들의 세계에서도 의리를 말합니다. 좀 더 규모가 큰 조폭의 세계가 국가라는 이름입니다. 국가가 조직폭력배와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조폭들이 지켜달라고도 하지 않은 영업장소에 와서 자기들이 지켜준다고 세금 내라고 합니다. 국가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준다면서 세금 내라고 합니다. 이런 조직들은 그 조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면 의사(義士)라고 합니다. 안중근의사는 대한민국의 의사이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테러범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한 것은 이런 세상의 행사를 다 악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나 양심대로 산다는 이방인이나 모두가 다 죄 아래 갇혔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떤 인간도 스스로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3:19-26절을 봅니다. “봉독” 율법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인데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하나님의 정죄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사람이 믿어주는 행위가 아니기에 결코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은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 화목제물이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된 것을 그의 피로 인하여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입니다. “봉독” 이 한절의 말씀을 지금까지 풀어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갈라디아서에서 왜 다시 로마서에서 언급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베드로와 바나바가 이 믿음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하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바울을 비교하면 누가 선배입니까? 베드로가 대선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을 합숙하면서 훈련을 받은 제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 이름 중에 항상 먼저 나오기에 우리는 수제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제자훈련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잡아 죽이고 박해한 사람입니다. 그런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이방인들에게 아무른 율법적인 조건도 없이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전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런 바울이 베드로와 바나바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1-13절입니다. 게바 즉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바울이 책망을 하였다고 합니다. 책망의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그들의 식사자리에 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식사를 하지 않았던 것처럼 외식하며 자리에서 물러난 것입니다. 그러자 바나바와 함께한 유대인들도 미혹을 받아서 그렇게 외식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베드로는 사마리아 사람들도 복음을 듣고 성령이 임한 것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과 11장을 보면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그 집에서 며칠 묵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가기 전에 환상을 먼저 봅니다. 점심 기도시간인데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커다란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네 귀퉁이를 묶은 보자기 안에 율법의 의하면 먹지 못할 부정한 짐승과 곤충들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나기를 이것을 잡아먹으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입에 결코 이런 것이 들어간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음식규례를 다 지켰다는 말입니다. 이런 환상이 세 번이나 보여주면서 내가 깨끗하다고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고서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고 있을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왔습니다. 베드로가 가기를 머뭇거리니 성령께서 염려하지 말고 가라고 해서 갔고 복음을 전하자 그들도 동일한 성령을 받았기에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야고보에게서 사람들이 왔다는 것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들은 예순님도 믿지만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기에 이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더라는 소문을 낼까봐서 식사하지 아니한 것처럼 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바울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데 이방인과 식사한 것은 한 형제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왔다고 아닌 척 하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는다고 공격한 것입니다.

 

율법주의라는 뿌리 깊은 모습을 베드로와 바나바에게서 봅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소개한 사람이며 안디옥에서 함께 이방인을 위한 사역을 하였는데도 베드로의 그런 태도에 미혹이 되어 함께 외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대적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기에 바울은 분노한 것입니다. 지금 선배고 무엇이고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감히 율법적인 규례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형제들을 외모로 차별하느냐는 책망인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와 바나바의 모습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음의 진리를 훼방하는 것이라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14-15절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는 베드로를 보고서 바울이 책망한 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느냐는 책망을 하면서 자기들은 본래 유대인이며 이방 죄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정도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대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방 죄인이 아니고 자기들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로 여기고 있는데 의롭게 되는 일이 결코 율법의 행위로 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인 줄 알았기에 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베드로도 동의한 사실인데 다시 외식하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논쟁의 최종 결론은 사도행전 15장에서 베드로와 야고보가 사도들의 회의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 16절의 말씀입니다. “봉독”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닙니다. 양심적으로 살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선악을 조율하여 선을 악보다 많이 쌓았다고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이 믿음이란 우리의 믿어주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요즈음 신약학자들이 이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번역을 합니다. 목적격으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의 소유격으로 번역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믿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이란 예수님의 믿음을 주셨기에 믿게 된 것이라서 자기의 자랑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이 종교개혁 464주년입니다.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개혁의 횃불을 들은 것입니다. 그 개혁의 주장은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인간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없고 오직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교회가 핍박을 받는 자리에서 군림하는 자리로 갔을 때에 교회가 부패하였습니다. 중세 천년을 교회가 그렇게 타락한 이유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이라는 정신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도 중세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온갖 행함 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교회 안에 파고 들어와 그것이 마치 복음의 진리인양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30-33절입니다.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롭게 되는 것과 전혀 상관없었던 이방인들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 그러나 의의 법이라고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이 요구하는 의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였기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걸림돌이며 거치는 바위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오직 은혜로 주어진 믿음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