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에베소서 4:26~27 분을 내어도 2013. 8. 18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지난 주 말씀에서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지체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몸이 머리로부터 지시를 받는 것처럼 온 몸의 지체들이 한 머리에 붙어있기에 서로 거짓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합니다. 이와 연결하여 오늘 말씀도 계속됩니다. 한 지체가 되었기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마귀가 틈을 타게 됩니다.

 

우선 분노에 대한 몇 가지 견해들을 봅니다. 2013년 2월에 스테판 에셀이 죽었습니다. 스테판 에셀은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였으며 외교관도 한 사람입니다. 퇴직 후에 인권과 환경문제에 많이 활동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2011년에 저작한 책이 ‘분노하라’였습니다. 무관심이 최대의 악이라고 하면서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라고 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분노를 의분(義憤)이라고 합니다.

 

유대의 랍비이며 마틴루터 킹 목사와 함께 인권운동도 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 ‘예언자들’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언자란 본인이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하여 아니다를 말하고 그 습관과 억지주장, 자기만족, 고집스러움, 적당한 혼합주의에 대하여 비난을 퍼붓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끔 자기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의 반대를 주장해야한 할 때도 있었다. 그의 근본적인 목적은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였다. 왜 이 둘은 화해를 해야 하는가? 아마도 그 원인은 인간의 잘못된 주권 의식, 자유의 남용, 공격적이고 안하무인격인 교만,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마음 탓이리라”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말하는 분노보다 나의 분노가 더 큽니다. 지난 한 주간 무엇에 분노하였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은 너무 길기에 오늘 아침 눈뜨고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무슨 일에 분노가 일어났습니까? 아마 수도 없이 많은 분노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밥을 준비하고 먹으면서, 교회당 갈 준비하면서, 차를 타고 오면서 끼어드는 차량으로,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등의 상황에서 우리는 늘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분노는 결국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인한 분노입니다. 이러한 분노를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분노가 어떤 분노인지 오늘 말씀으로 점검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최초의 분노는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입니다. 그런데 선악과의 유혹도 사실은 인간의 분노를 자극하는 내용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너도 하나님처럼 될 줄을 하나님께서 아시기에 따 먹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자극을 하였습니다. 열등감을 심어주어 분노가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따 먹었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시자 가인이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대하여 분노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노는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인 우리들은 늘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분노가 일어납니까?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데 대한 분노입니다. 이런 분노가 분초마다 일어나는데 오늘 말씀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의 영어 표현은 분노를 가지고 침대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마귀에게 틈을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말씀들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지체가 되는데 분을 품고 있으면 마귀가 틈을 타서 그리스도의 몸을 분리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데 그리스도의 몸을 깨는 주된 원인들이 분노로 인한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중심의 정의감을 가지고 서로 교회를 위하고 합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분노를 합니다. 자기는 진리의 편에 섰다고 생각하기에 교회에서의 싸움은 정말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뉴스 엔조이에 서울의 제자교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목사는 선교비를 정당하게 섰다고 하고 반대 측에서는 선교비를 부당하게 사용하였다고 고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2년 실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복역 중에 가석방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교회는 둘로 나뉘어져서 두 노회의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목사가 석방이 되어 나오자 지지자들과 함께 예배당에 가서 기도하는데 한 쪽은 박수를 치며 환영하고 한 쪽은 도둑놈 물러가라고 합니다. 이런 교회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그 이유는 서로 정당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평소에 분노가 일어날 것입니다. 일어나지 않을 수 없기에 원어적인 뜻은 분노하라 그러나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노하라는 것은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분노가 아니라 정당한 분노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32:19절입니다.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가 40일 동안 하나님의 언약의 돌 판을 받아 내려오는 중에 밑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면서 그것이 자기를 애굽에서 구원한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것입니다. 모세가 분노하여 그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립니다.

 

그 돌 판의 내용 첫째와 둘째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과 어떤 형상에도 절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그 돌 판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멸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분노로 돌 판을 던져 깨뜨림으로 진멸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분노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분노입니다. 그 돌 판은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어짐으로 자기 백성이 살았습니다. 이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이 깨어짐으로 자기 백성을 살려내십니다.

 

수요일 저녁에 예레미야 7장 말씀에서 이 성전이 여호와의 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전이라는 곳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다는 책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분노하십니다.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십니다.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상을 뒤 엎으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자신의 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강도의 소굴이 된 건물 성전을 부수어 버리고 자기 몸을 성전으로 세우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자기 몸이 십자가에서 깨어지고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일상적인 분노들은 전부 자기중심적인 분노들입니다. 그러므로 분노가 나올 때에 그 분노를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합니다. 너의 분노는 옳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분노를 품고 있으면 마귀가 틈을 타는 것입니다. 마귀가 틈을 타게 되면 자기의 분노는 언제나 정당한 분노 의로운 분노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런 분노들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에 동원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만 죽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 하는 스데반 집사와 제자들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분노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자기의 분노를 오래 품고 있는 것이 죄임을 알고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분노를 알면 자기의 분노가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18:15~35절입니다. “봉독” 네 형제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죄를 범한다는 말은 다른 번역에서 네게 죄를 범하면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어떤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였다면 그 사람에게만 권고하라고 합니다. 만약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지만 듣지 않으면 두세 증을 데리고 가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처럼 여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직 교회의 형제 안에서 풀지 못한 것이 있다면 하늘에서도 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느냐고 하면서 일곱 번이면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하라고 하시면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도 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만 달란트 졌습니다. 그런데 갚을 것이 없자 주인이 그 몸과 아내와 자신들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갚으라고 합니다.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 금액인지 성인 남자가 20년 일해야 갚을 수 있는 돈이 겨우 1달란트입니다. 그러자 이 종이 엎드려 절하며 참아달라고 하면서 갚겠다고 합니다. 결코 갚을 수 없는 금액이기에 주인이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었습니다.

 

기분 좋게 돌아가는 길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멱살을 쥐고 갚으라고 합니다. 곧 갚겠다고 하지만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백일 일하면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 동료들이 이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전합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 사람을 잡아오게 하여 말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깁니다. 여기서 주인 노하였다는 이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의 ‘분’이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주인의 분노는 용서를 모르는 이 사람에 대한 분노입니다.

 

이것이 천국비유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분노들은 그 분노로 인하여 자기 백성의 구원이 일어나는데 방금 이 말씀에서 주인의 분노는 영원한 심판이 됩니다. 이것이 무슨 분노입니까? 주인의 긍휼을 잊어버리고 모독하는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 중에 저주를 받은 아들이 함입니다. 함은 자신이 하나님의 덮어주심을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지 못하고 드러냄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분노가 무엇인지를 알면 자신의 분노라는 것이 죄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분노를 해가지도록 품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분노로 인하여 누구 죽임을 당하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자기 분노를 마치 하나님의 분노나 성경의 의로운 분노처럼 붙들고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분노가 옳다고 분을 품고 있으면 마귀가 틈을 타서 모든 관계를 파괴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다들 분노가 가득합니다. 길을 다니는 사람도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얼굴에 분노가 가득합니다. 누가 걸리기만 해라 부수어버리겠다는 모습들입니다. 부부 관계, 부모 자식관계, 성도안의 관계들 속에 어떤 분노들이 있습니까? 그 분노를 지금도 가지고 있으면서 내가 정당하다고 여기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마귀에게 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9~21절입니다.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하나님의 분노나 하나님께서 주신 분노가 아닌 사람의 분노는 결코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지 않고 분노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15:11~28절입니다. “봉독”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탕진하고 돌아온 작은 아들을 아버지는 기뻐하면서 아들로 맞이합니다.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며 기뻐하면서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입니다. 그런데 신실하게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고 있던 아들이 들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다가 잔치 소리를 듣고 종에게 물어보니 일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8절을 보시면 그가 노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고자 아니합니다. 아버지의 거저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분노합니다. 사람의 분노란 자기 의에 근거하여 분노를 발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분노가 자기 의로움에서 나온다면 이것이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모든 관계에 분노가 일어난다면 마귀가 틈을 탄 것입니다. 그 분노로 하나님마저 살해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시고 속히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