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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1~2 하나님을 본받아 2013. 9. 15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오늘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는 죄와 사망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인들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5:1절에서 ‘그러므로’가 나옵니다. 앞에서 연결되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와 연결되는 최소한의 단락은 4:25~32절입니다. 여기서 25절을 보시면 ‘그런즉’이라는 말로 또 앞의 부분과 연결이 됩니다. 이렇게 나아가면 결국 1:1절까지 가야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1절부터 개략적인 제목만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1:1~2절은 인사말입니다. 1:3~14절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1:15~23절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도록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2:1~10절은 은혜의 선물인 새로운 삶을 말씀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2:11~18절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새 사람을 만들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신 교회를 말합니다.

 

3:1~13절은 이방인을 위한 바울 사도의 직분과 그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3:14~21절은 교회를 위한 사도의 기도입니다. 4:1~16절입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하나 된 몸을 위한 은혜와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4:17~24절입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비교합니다. 4:25~32절은 새로운 삶을 위한 구체적인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다 연결되어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다시 5:1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1:1절부터 전체를 살펴본 그 내용이 바로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하신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위하여 아들의 피로 구속하실 백성들을 이미 작정하셨습니다. 그런 자들을 때가 되어 복음으로 불러내십니다. 복음을 들을 때에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야 믿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4:4~7절입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가 되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여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신 결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들이기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가 됩니다.

 

히브리서 5:5~10절입니다.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ㄱ)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시 2:7)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ㄴ)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시 110:4)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는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 이 길을 가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으시고 만들어내시는 과정이 고난입니다. 그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과정입니다.

 

다시 본문 5:1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1:1~4:31절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에 대한 말씀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새사람이 만들어져 아버지께 나아가게 된 그 사랑을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본받는 자라가 되라고 합니다. 이런 사랑을 받는 자답게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그 사랑이 다 하나님아버지로부터 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본받아야 할 사랑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5:2절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로 사랑가운데 행하라고 합니다.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가능한 일입니까? 제가 지난주에 용서를 말씀드리면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어 있을 때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였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용서하셨고 사랑하셨기에 그 용서와 사랑을 자기 백성에게 성령으로 수여하십니다. 이런 사랑을 받았기에 이제 조건적인 용서나 사랑을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용서와 사랑과 같이 이웃에게 다가 가보라고 하였습니다.

 

실천해 보신 분 손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조금이라도 실천해 보신 분은 이런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이미 용서하였고 사랑하였다는 그 완성을 가지고 상대방이 어떠하든지 간에 내가 용서하고 사랑하리라고 결심하고 다가갔는데 상대방이 오히려 큰소리치고 무시하고 자존심 상하게 하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내가 이미 용서하고 사랑하였기에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왔는데 이런 나의 마음을 몰라주다니 이런 쓸데없는 짓을 내가 왜하느냐는 마음이 들면서 분노가 일어나게 되었다면 이 말씀을 진지하게 실천해 본 사람입니다. 그렇게 실천해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다시 실천해 보라는 권면의 말씀을 드립니다. 실천의 대상은 가장 가까이 있는 분에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 보셔야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본받을 수 없는 자인지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5:37~40절입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ㄷ)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신 6:5)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ㄹ)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레 19:18)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綱領)이니라”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의 핵심내용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사랑을 하셨습니다.

 

로마서 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내어 놓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바로 사랑의 확증이며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것처럼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합니다.

 

로마서 13:10절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613가지의 율법을 10가지로 요약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이것을 다시 둘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을 하나로 줄이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가 안 되고 사랑이 안 된다고 합니다. 나도 안 되고 너도 안 되기에 원래 안 되는 것이 마치 정상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곳에서는 노력이라도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말한다는 곳에서는 인간의 죄가 어떠한지를 자주 말하니 어느 누가 그런 인간이 있는가 보자는 식으로 나옵니다. 이게 정상인가요? 이런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치며 통곡해야 하지 않습니까?

 

5:2절을 다시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희생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구약의 향기로운 제물 또는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것은 소나 양을 번제로 드립니다. 양이나 소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다 드러내고 나서 그 기름과 고기와 뼈를 몽땅 불로 태워드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신 것이 바로 이 사랑입니다.

 

로마서 12:1절에서도 너희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영적예배라고 합니다. 어떻게 산 제물로 드립니까? 나는 사랑도 용서도 할 수 없는 죄인임을 시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내가 능력을 받아서 내가 사랑하려고 하면 아직 내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이웃을 사랑 하려고 할 때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의 전부를 드림이 이웃사랑으로 나옵니다. 이러한 일을 주님께서 어떻게 이루시는지 마게도냐 교회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8:1~5절입니다.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이런 놀라운 일이 나타나는 것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면서 또다시 그래 내가 먼저 하나님께 나를 드리고 나서 이웃에게 드리자고 나온다면 이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입니다.

 

요한계시록 5:9~10절입니다.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주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신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에 의하여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이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로 사서 드린다는 것은 우리를 그의 죽으심에 연합시키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1~24절입니다.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7)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헬, 당신께)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때로부터라는 말씀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한때를 말씀합니다. 이 신앙고백도 베드로의 혈육의 능력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께 그런 고난과 죽음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리고 나섰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사탄의 일 곧 사람의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실패로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 십자가는 애를 먹이는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과 환경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라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그런 자기 결단과 의지와 신념에 대한 죽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실천을 많이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율법적인 실천만이 아니라 개혁주의 원리인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으니 이제 거듭난 내 자신이 열심히 성화하여 이런 일을 이루어보려고 정말 많이 노력해 본 사람만이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아주 피상적으로 실천해 본 사람은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금식도 철야도 해 본 사람은 이 말씀을 이해합니다. 그러면 그런 율법적인 과정을 겪지 않으면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모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반드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예레미야 식으로 말하면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립니다. 그러고 나서 건설하며 심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들어가면 이제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나를 이끄시고 다스리고 주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사랑의 길로 인도하여 가십니다. 이런 자들에게 나오는 고백은 자기가 아니라는 자기 부인이 반드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자신이 어떤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지만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고전15:10).

 

끝으로 로이드 존스의 고별설교라는 대구 서머나 카페의 글을 옮깁니다. 로이드존스 목사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앞부분에서 전하지만 그 결론은 거의 성화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고별설교는 그러한 성화나 그리스도를 본받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여러분과 저의 작은 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무엇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나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전보다 얼마나 더 변화되고 나아졌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 분의 흠 없고 완전한 의가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분을 믿으면 그분의 완전한 의가 주어지고 여러분은 그분의 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나 저것을 행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안식을 주지 못 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무익할 뿐입니다.

그러니 중단 하십시오 이것은 절대로 여러분을 그 어디로도 인도하지 못합니다.

더 멀리 가기 전에 멈추십시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나가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 순간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가엽고 비참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거기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가장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을 뿐입니다.

그 은혜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를,

만인이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것으로 변질시키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