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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3~4 성도에게 마땅한 바  2013. 9. 22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지난주 설교에서 숙제를 드렸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랑과 어떠한 용서를 받았는지 성경을 통하여 배웠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어 있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받은 자로서 가까운 가족과 이웃에게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 보셨습니까? 실천 해 보신 분은 실천 하지 않았을 때 보다 더 큰 싸움들이 일어난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에 어떤 생각들이 났습니까? 그래 어차피 인간은 죄인이야 그러니 그냥 내 마음대로 살자는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까?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냥 살았을 때에는 별 어려움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다 그런 거지 뭐! 하면서 살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속 편했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 죄인이 뭐 별수 있나!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니 오히려 더 큰 싸움과 어려움이 오니 이제부터 나는 옛날 방식 그대로 살아가야지! 이런 결심으로 오늘 오시지 않았습니까?

 

예레미야 44:16~18절입니다. “16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17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18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우상숭배 할 때에는 풍부하며 복을 받고 살았는데 우상숭배를 버리고 나자 오히려 더 궁핍하여 졌고 칼과 기근에 망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들의 경험으로 나온 말입니다. 온갖 우상숭배를 이스라엘 땅에 가득하게 한 므낫세 왕 때에는 오랫동안 나라가 평안하고 번영하였는데 요시야의 개혁으로 온갖 우상들을 버리고 나니 오히려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다시 우상숭배를 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입니다. 전에 살던 방식이 더 좋다는 말을 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러하지 않습니까?

 

지난주의 말씀이 ‘하나님을 본받아’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신 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본받음이 불가능함을 로이드존스 목사의 고별설교로 마무리 하였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시고야 마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반드시 자기 부인과 자기 해체의 과정을 겪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마땅한 바가 됩니다.

 

로마서 8:28~30절입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은 이미 확정되었고 이미 이루셨습니다. 이 일을 이 역사 속에서 성도들에게 어떻게 이루어내실까요?

 

오늘본문 3절입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오늘 설교제목이 ‘성도의 마땅한바’입니다. 성도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시고 성령으로 구별하여 놓은 자를 말합니다. 어제까지 세상과 더불어 살던 자를 오늘 성도로 구별하여 놓았습니다. 이런 자들에게서 옛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옛 사람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벗겨내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들어내시는 과정이 바로 이 역사라는 삶의 현장입니다. 예수 믿고서 바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지 않고 이 땅위에 살려두신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고 바로 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은 이유가 이 땅에서 천국에서 받을 상을 준비하라고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전도해서 하늘 아파트의 평수를 넓히라고 합니다. 하늘의 상을 위하여 헌신과 충성과 봉사를 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이 역사 속에서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만 상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상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남겨두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하기 위한 신부로 만들어 내시기 위한 훈련의 장이 교회입니다. 신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훈련을 받는 장(場)으로서 역사가 필요합니다.

 

왕자와 거지라는 이야기입니다. 왕자가 왕궁에서 사는 것이 지루하여 왕궁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곳에서 자기와 꼭 닮은 거지에게 왕자 복을 입히고 왕궁으로 들여놓고 자기는 거지의 옷을 입고 왕궁 밖으로 나가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중의 결론은 누가 진짜 왕자인지 구별하는 이야기로 왕의 도장을 어디에 두었느냐는 것으로 구별합니다만 오늘 핵심은 거지가 왕자의 옷을 입고 왕자의 신분이 되었지만 그 습성들이 거지입니다. 그런데 신하들이 어떻게 합니까? 왕자가 아파서 그런 줄 알고 다시 왕자의 교육을 다 시켜낸다는 이야기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영 단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대로 일어난 일입니다. 이로서 끝이 아닙니다. 이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죄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가 어떠한지를 알고 그 죄들이 깨어져 나가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이 일에 우리가 얼마나 순종하지 않고 대드는지도 알게 됩니다. 앞에서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보았듯이 내가 예수 믿고 나서 되는 일보다 오히려 안 되는 일이 많다는 마음도 들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못하게 하고 하기 싫은 것만 하게 하는 것이 성경말씀처럼 보입니다.

 

다시 3절을 봅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음행이란 헬라어로 ‘포르네이아’인데 ‘포르노’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온갖 더러운 것도 성적인 것을 말하지만 온갖 이라고 하였기에 성적인 것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더러움을 다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탐욕이라는 말로 모아집니다. 탐욕이란 자기만족을 위하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욕망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음행을 하지 않지만 다른 것들로 자기 욕망을 채웁니다. 탐욕이란 돈을 주고 행할 수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재미가 있습니까? 재미가 없습니까? 죄 짓은 일치고 재미없는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성도로 구별된 자들에게 나타나고 있기에 바울사도는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쓴 것입니다.

 

4절입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합니다. 3절에서 세 가지를 말하고 4절에서도 세 가지를 말합니다. 누추(陋醜)한 말이란 추잡(醜雜)한 말입니다. 어리석은 말이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덕스럽지 않는 무익한 말들입니다. 희롱의 말이란 상스러운 농담정도를 말합니다. 이러한 말들과 행동들이 성도가 되기 전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과 말들이며 다 재미있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도로서 이런 말들은 그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도 다 전에는 그와 같은 무리 속에서 그와 같은 말과 행동을 하고 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6:9~11절입니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5:5절의 말씀에도 나옵니다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어떠한 자들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라고 부름을 받은 고린도 교회 안에 전에는 이러한 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미 완료형으로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에게서 더러운 말들과 행동이 나오고 있다면 이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둘 중의 하나입니다. 교회당에 다니고는 있지만 성도가 아니던가? 아니면 성도이기는 하지만 아직 덜 죽어서 그렇든가? 우리는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이기를 우리는 희망합니다만 희망은 고문일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고문이겠습니까? 세상의 재미와 유혹들을 전혀 끊을 마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성도가 아닐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성령께서 성도 안에 오시면 반드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책망을 하십니다.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하십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온갖 더러운 말들과 행동들로 인하여 애통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애통도 없이 더러운 것들을 즐긴다면 성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음행, 온갖 더러운 것, 탐욕, 누추함,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들은 그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세상의 사람들이 즐기는 세속적이고 육적인 욕망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란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이 다 온갖 더러운 것들에 속합니다. 자기 의, 자기 자랑, 자기 공로들이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멀리하게 하는 더러운 것들이 됩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앞의 것들만 깨시는 것이 아니라 뒤의 것들도 반드시 깨십니다. 그래서 사람막대기와 인생채찍을 드시는 이유는 자기 자녀들에게만 이렇게 행하십니다. 이것이 아픈 사랑입니다.

 

지난주에 허운석 선교사님 별세하신 소식을 남편 되신 김철기 선교사님의 글을 오후에 읽어드렸습니다. 오늘은 선교사님의 마지막 일기를 소개합니다. 선교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강렬하게 남은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자아가 하늘보좌 앞에 까지 서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자아를 부수어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만들어 내시는 그 사랑을 전하여 들었습니다. 그 마지막 일기를 읽어 드립니다.

 

“주여 저들은 내 앞을 지나며 머리를 흔드나이다. 주여 나는 사람이 아닌 벌레로소이다. 주의 귀한 말씀도 내 입술에서 닫혔나이다. 나는 내 입을 열수 있는 작은 힘도 갖지 못하나이다. 당신의 말씀으로 인해 존귀해 있던 저였음을 보나이다. 나의 숨통은 나를 말할 힘을 열어주지 못합니다. 그저 나는 죽은 자처럼 그들 앞에 앉아 있습니다. ___** 나의 육체는 점점 자기기능을 상실해 가나보다. 순간순간 힘겨운 위기를 느낀다. 숨쉬기 힘들어 하는 내 모습에 내 영혼은 놀라워하고 두려워 떤다. 육체가 주는 고통으로 인해 영혼은 어둠속 깊은 곳으로 던져지고 그곳에서 어두워져 있다. 한줄기의 빛없이 어둠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 고통에 물리고 찢기고 뜯겨져서 만신창이로 만드는 것. 울부짖는 영혼은 어떤 위로도 그 어둠 속에서 경험하지 못한다. 그저 비명만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 예수님.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으시다. 그 고통을 온통 고스란히 당한다. 그 고통의 불이 온 몸과 육신 골골이 훑고 태워간다. 나는 이 불을 지나가나이다. 내가 불을 통과하나이다. 통과하게 하시기 위해 질러진 불이 것만 그것을 줄여 달라 하니_ 그 만한 불의 무개가 아니면 주님의 원하시는 작품이 완성이 되겠는가? 아! 하나님 나는 사람이 아니요 벌레니이다. 고통을 싫어하여 흉한 몸을 비트는 벌레니이다. 나의 아름다움을 모두 거두시는 하나님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갈아입히시려고 하시나이까? 그러나 나는 나의 몰골에 놀라워합니다. 눈을 뜨고 싶지가 않습니다. . . .”

 

이 일기의 배경은 시편 22편입니다. “봉독” 그리스도의 고난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에게도 임하게 됩니다. 물론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그리스도 함께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시는 것입니다. 이 길이 성도에게 합당한 길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에게서 온갖 더러운 말과 행동들이 나올 틈도 없도록, 침 삼킬 틈도 주시지 않고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시는 그 주님의 열심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