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다운받기] 

에베소서 4:30~32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2013. 9. 8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말씀을 어느 정도로 평소에 생각하면서 살아갑니까? 우리의 우선적인 관심은 이런 말씀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환경입니다. 환경과 먹거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일본의 수산물을 수입하느냐 아니하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경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언제 경기가 호전될지를 생각합니다. 추석대목을 봐야하는 상인들은 어떤 물건을 팔아야 이익이 남을지를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활의 염려들이 우리의 근심거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편지로 책망을 하였습니다. 책망을 바르게 받아들일지 바울이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책망을 받은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회개하였는지 11절에서 이렇게 증언 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게 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룹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이 책망을 듣고 근심하게 된다면 이것이 바로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근심은 하지도 않고 거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만 염려한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지 않는 세상의 사람들이나 염려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런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것이 지극이 당연한 일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성령에 대하여 간단히 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진다는 것은 이미 구약에서 새 언약으로 약속한 내용이며 종말의 현상입니다(렘31장, 겔36장, 요엘2장) 이러한 약속의 성취를 사도행전 2:33절에서 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들 안에 성령이 임하여 복음을 듣고 믿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한 자들을 성전이라고 합니다(고전3:16, 6:19).

 

성령이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제한된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가 없고 방금 보았던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오십니다. 성령이 자기 백성에게 부어짐은 아버지와 아들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하신 그 성령의 일만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6:1~15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미리하신 이유는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출교하고 죽이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을 해 두시는 이유는 성령이 임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핍박이 올 것인데 그 때에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은사주의자들이 흔히 말하는 성령의 역사나 성령의 충만함과 전혀 다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까지 하신 것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성령이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 아무에게도 성령이 임하지 않았는데 예수님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이 분이 장차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세례요한이 증거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한량없이 부어지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 고난과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게 되면 반드시 예수님께서 가신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은 함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행하는 것이 다 죄가 됩니다(롬14:23). 의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은 세상에 의가 없다는 책망입니다. 심판에 대한 것은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성령이 오셔야 이해가 되며 이 성령은 또한 진리의 성령이기에 자기 백성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스스로 말하지 않고 반드시 보내신 분의 말을 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하시는 일을 요한복음의 이 말씀에서 비추어보면 하나님의 성령의 근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죄의 의와 심판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시는데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관심도 없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신다고 하시는데 오늘날 이 땅에 수많은 성령운동을 한다는 자들은 마치 성령을 자기들이 소유하고 부리듯이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령이 근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추구하는 일에 성령을 끌어들이기에 근심합니다.

 

이제 본문을 봅니다. 30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령이 성도 안에 오셨지만 또한 성도는 성령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에게 오신 것은 구원의 날까지 인을 치셨다고 합니다. 인을 쳤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말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주장을 하고 사는 자를 하나님의 성령께서 근심하시고 슬퍼하시고 탄식을 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5~29절을 봅니다. “봉독” 그동안 한절씩 살펴본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아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옛 사람의 자기주장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거짓을 말하고, 분을 내고 오래 품고, 도둑질하고, 더러운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이런 것이 나오는 것이 성령이 근심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과 행위들이 단지 세상의 윤리도덕적인 차원만의 것은 아니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의 윤리도덕적인 차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기적인 자기주장들이 나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에베소서 4:31절도 성령이 근심하시는 내용들입니다. 모든 악독, 노함과 분 냄, 떠드는 것, 비방하는 것, 모든 악의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씀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입니까?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은 성령이 임하지 않아도 믿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곳에 얼마든지 사람들이 몰려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는다는 에베소 교회에 이런 말씀이 주어진다는 것은 오늘 우리도 예외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복음을 듣고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은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마치 자기 소유로 삼고 마음대로 부리듯이 하는 부분은 나중에 성령의 충만함에 대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옛 사람들의 모습을 성령이 근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가 어떠한 부르심을 입었는지를 알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1:13~14절을 봅니다.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4)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헬, 보증금)”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령의 인 치심이란 성령께서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기업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영원한 기업을 말합니다. 성령은 이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보증이 되셨다고 합니다. 보증이라는 헬라어로 보증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동산을 구입할 때에 계약금을 지불하여야 계약이 됩니다. 계약금은 일반적으로 십분의 일입니다. 그런데 계약금을 천억을 주었다면 그런 계약은 어떻게 됩니까? 계약을 한 사람이 취소를 하면 천억이 그냥 날아갑니다. 이런 계약은 반드시 성사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약을 만원을 주었다면 그런 계약은 깨어져도 별 상관없는 계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피로 사시고 보증금으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완전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증금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내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파기되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1:20~22절입니다.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어집니다. 그 이루어진 약속을 우리에게 도장을 찍으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도가 얼마나 엄청난 자들인지 아시겠습니까?

 

베드로후서 1:3~4절을 봅니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신성한 성품을 전에 성경에는 신의 성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힘써 믿음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을 더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썩어질 것들을 추구하기에 성령이 근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는 일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내용들을 오늘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이런 말씀을 듣고 이렇게 결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이제부터 내가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나의 결단과 결심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죽을 수 있습니까? 혼자서 도를 닦거나 큰 깨달음을 얻는 방식이 아닙니다. 사람 막대기 인생채찍으로 우리를 죽여나가십니다. 이런 일을 훈련시키시는 마당이 교회이며 가정입니다.

 

이런 훈련을 받으실 때에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 같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용서를 주셨습니까? 이러저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면 용서하겠다고 오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 되어있을 때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자기 죽음인 십자가로 이미 용서하시고 그 용서를 성령을 통하여 자기 백성 안에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관계 속에서 용서를 할 때에 조건을 걸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용서를 받았다면 상대방에게 당신이 이렇게 하면 용서하겠다는 조건을 걸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지금 고치든 아니든 나는 당신을 이미 용서 하였습니다. 이런 용서가 십자가로 다 이루신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 용서가 우리 안에도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