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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에베소서 3:10~11 하나님께 나아감 2013. 1. 6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가 얼마나 엄청난 비밀인지 하늘의 천사들도 몰랐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일을 시중드는 천사들도 타락한 인간들을 어떻게 구원하여 내실지 몰랐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을 통하여 끝없이 실패하는 이스라엘을 천사들이 보면서 인간은 구원받지 못할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 앞에 어느 인간도 설자가 없음을 천사들이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 아래 죄 아래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늘의 천사들도 몰랐던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입니다. 이것이 영원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뜻입니다. 이 뜻의 비밀을 교회에 알리시고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알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들이 어떻게 교회를 통하여 드러났는지를 보여줍니다.

 

시편 85:1-2절입니다. “1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2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말합니다. 이런 야곱이 포로가 된 것은 야곱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포로로 잡혀갔으면 그 죄로 인하여 멸망하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아무른 이유도 없이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에 문제가 있게 됩니다. 공의대로 하면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과 긍휼로 인하여 이들을 또한 용서하십니다. 이 충돌을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시편 85:10절입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인애는 긍휼이며 사랑과 화평입니다. 진리는 의와 공의와 정의입니다. 이 둘은 서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셔서 사랑으로 화평을 하려면 의가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두 속성이 함께 만나서 서로 입 맞추었다고 합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긍휼이 함께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심판과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시고 그 긍휼과 자비를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고린도후서 5: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3:13~14절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저주는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저주입니다. 자기 백성에게는 의롭다 하심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친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복이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 언약 체결에서 쪼개진 짐승사이로 하나님께서 타는 횃불의 형상으로 지나가시고 아브라함은 그냥 보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으로 언약을 체결하신 것을 이루신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일은 다른 세대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오직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에 알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십자가를 예배당 지붕에 세웠다고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의 뜻을 알고 그 십자가에 함몰되어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디모데전서 3:14-16절입니다.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됩니다. 이 교회는 경건의 비밀을 아는 곳입니다. 경건의 비밀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고 영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중에 올려 지신 분입니다. 이 진리를 가진 곳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기에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은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는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라는 말이 원문에는 없지만 문맥상 넣어서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2:18절을 다시 말씀합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예수의 피로 한 새 사람을 만들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일을 아는 곳이 이 땅에 오직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복이라는 말씀을 수요일 저녁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는 말씀은 시편 73편의 말씀입니다. 시편 73편은 악인의 형통과 의인에 고난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하여 결론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거하시고 거룩하십니다. 영이시기에 사람이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이 하나님을 뵙게 되면 죽게 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짐승이나 사람이나 어느 선 이상 올라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죽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습니다(출19:20~25). 그러면 모세는 어떻게 여호와 앞에서 말씀을 듣고서 살아남았습니까? 은총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3:17~20절입니다.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누가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죄인이 나아가면 죽음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비워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시는 것이 은혜며 긍휼입니다.

 

빌립보서 2:5~8절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자기 백성들은 이 코스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4:16~24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시게 하신답니다. 그 보혜사는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란 제자들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증거 한 복음을 듣고 믿습니다. 이것 또한 성

령으로만 됩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까? 성령의 진리의 영이기에 세상은 받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는 그를 압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영이 함께 계시고 너희 속에 계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날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을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이 오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처소로 삼으셨는데 왜 사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다는 표현을 쓸까요? 그 이유는 전에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피를 힘입어 담대하게 확신을 가지고 아버지께 나아갈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5:1~2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간다는 것은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아가는 것이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5:3~4절을 봅니다.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합니다. 환난을 당하는 것도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박주한 집사님이 교회에 처음 온 사람에게 환난이 축복이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환난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겠느냐는 말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봄과 가을에는 해외골프 투어를 하고, 여름에는 스킨 스쿠버를 하고, 겨울에는 스키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그 장비들이 창고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환난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길로 들어섰기에 환난이 복이라고 처음 교회에 온 사람에게 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3:13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사도가 환난을 당하는 것은 자기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환난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환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환난조차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환난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나아간다는 것은 내가 여기 있고 하나님이 저 멀리 있기에 내가 여러 가지 애쓰고 노력하여 나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먼저 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잡힌 것을 잡는 것입니다(빌3:12).

 

고린도후서 1:3~9절입니다. “봉독” 바울이 환난 당하는 것이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환난이 심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하시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환난조차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조차 성도에게는 영광입니다. 성도에게 모든 일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만하여 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