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에베소서 3:12~13 환난이 영광입니다 2013. 1. 13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지난 주간에 저는 행복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설교를 여섯 시간에 걸쳐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동안 늘푸른 교회에서 전하고자 한 내용들을 여섯 시간에 압축하여 더 강렬하게 전하는 설교를 들으며 때로 미소를 짓기도 하고 나의 약함과 악함을 더 드러내야 한다는 도전도 받았습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이야기라는 말씀과 그 십자가가 자기 백성들에게도 주어지는데 그것은 자기 속에 숨겨져 있는 온갖 세상의 왕 되고자 하는 것들이 뽀록나면서 개망신을 당하고 자존심을 상하게 되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세상 임금이 쫓겨나가는 것이라는 말씀에 동지를 만난 기쁨이었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의 마무리가 환난은 축복이라는 말씀으로 에베소서 3:13절을 간단하게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로 넘어가려고 하였는데 선교사님의 설교를 듣고서 이 말씀을 한 번 더 전하여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환난이 축복정도가 아니라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3:1절에서 14절로 바로 넘어가야 문맥이 매끄러운데 에베소서 3:2~13절까지는 3장 14절 이하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비밀한 경륜의 결론이 13절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4절부터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로 바로넘어가면 하나님의 사랑을 또다시 사람들은 자기 좋은 방향으로 오해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환난을 통하여 주어짐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1:1~4절입니다.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이 재건되고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리라고 하였는데 영광은 고사하고 약한 나라가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시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가 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이 이 모양입니까? 이런 항의를 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였다는 대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미움을 받은 에서는 아브라함보다 더 부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병이 318명인데 에서는 사병을 400명이나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야곱은 평생이 삶이 환난이었습니다. 그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외삼촌 집으로 도망갈 때의 나이가 77세입니다. 외삼촌 집에서 아내를 위하여 14년 자기 품삯을 위하여 6년을 도합 20년을 어떻게 보냈는가 하면 야곱의 표현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이 말은 외삼촌 집에서 도망 나오다가 외삼촌의 추격을 받고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을 해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뿐 아니라 얍복강 가에서 에서가 군사 400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가축과 가족을 다 건너보내고 혼자 남았을 때에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 뼈가 위골됩니다. 이때로부터 평생 장애인이 되어 지팡이를 짚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됩니다. 그 이후에도 자기 딸이 강간을 당하고, 자기 아들이 자기의 아내를 건드리고,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과 애굽으로 이주하는 것들은 말 그대로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이런 야곱을 하나님은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 환난과 고난을 통하여 고난을 받으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언약을 바라보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야곱만이 아닙니다. 이삭도 고난의 세월을 보냈고 아브라함도 고난을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문명이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아버지 집에서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나그네로 아주 먼 길을 가야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온갖 험악한 일을 다 당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그 약속의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아브라함이 자기의 떼를 볼 것을 기다리다가 보았다고 합니다. 그 본 사건이 바로 이삭을 제물로 모리아 산에서 드리게 된 그 사건입니다.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안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40절을 봅니다. “봉독”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에 소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믿으면 받는다는 엉터리 번영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보이는 세계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믿음의 실체를 보여주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 그림자들은 온전한 실체가 나타나면 다 불에 태워져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이 과연 어떤 삶을 살았고 무엇을 바라보았는지 히브리서 11장은 구약 성경 전체를 요약합니다.

 

처음 믿음의 사람이 아벨입니다. 참된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은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자가 세상의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벨입니까? 가인입니까? 가인입니다. 남이 잘되면 시기가 나는 것이 가인입니다. 남이 칭찬받으면 입술을 삐쭉이는 자들이 우리들이기기에 우리가 가인입니다. 이런 가인의 속성은 이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때에 그 마음 안에 자리 잡은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함입니다. 자신이 최고여야 한다는 사단이 그 안에 자리 잡은 모습입니다. 우리가 다 이런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면 아벨처럼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당하는 환난입니다. 첫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 이러하기에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환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 환난이 어떻게 영광이 됩니까?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완성인 새 언약에 참여되기에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새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는 언약입니다. 이것을 구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약속으로 받은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상과 동행하였습니다. 에녹은 왕따 중에 왕따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에녹은 65세에 낳은 아들인 므두셀라가 죽으면 세상이 심판이 임한다는 계시를 받았기에 종말을 생각하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노아는 120년을 비도 오지 않는 세상에서 홍수로 세상이 멸망한다고 방주를 만드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은 약속을 바라보고 장막에 살았습니다.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 약속이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영원한 성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위하여 더 나은 본향을 예비하셨습니다.

 

모세를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애굽의 모든 보화와 영광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길을 간 것은 상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이 상이 무엇입니까? 세상이 말하는 상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는 것이 상입니다. 기생 라합이 조국을 배신하였습니다. 사사들과 사무엘을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이들의 특징들은 한 마디로 세상이 감당이 안 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은 받지 못하였는데도 이 정도입니다. 이들이 받지 못한 약속의 실체를 우리는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3:30~31절입니다.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하여 나가는 그 순간에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영광이라는 말씀은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십자가를 통한 영광을 증언 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0~12절입니다.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였고 복음을 전한 사도들도 이것을 알린 것인데 천사들도 알지 못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환난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실패하고 깨어지는 것이 영광인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 안에 숨겨진 신이 되고자 한 대적 자,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고 앉아서 네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속이는 그 사단을 부수어 내시는 일에는 환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죽음에 무서워하여 그 죽음의 종노릇하게 만듭니다(히4:15). 이 죽음이란 실패와 모독과 조롱들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당하지 않으려고 우리는 신에게 정성을 바쳐온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에게 속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이 구원 얻는 길은 환난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 환난을 통하여 자신의 약함과 악함이 드러나기에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이렇게 들통이 남으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른 소망이 없다는 고백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하나님과 거래하여 자기의 영광도 따로 챙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고 난 이후의 변화된 모습을 세상의 헛된 영광들로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헌신충성봉사를 합니다. 이것은 자기 사랑이지 하나님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것을 독려합니다. 그러면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죽도록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쭙잖게 복음을 듣고서는 모든 것이 은혜라고 하면서 대충 사는 사람은 자기 죄도 모르고 몇 가지 아는 성경구절로 자기 위안삼아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에베소서의 다음 내용인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환난과 고난과 핍박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사랑임을 모릅니다.

 

고린도후서 4:16~18절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환난을 통하여 보이는 것을 버리게 하시고 보이지 하는 영원한 것을 붙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 성도가 당하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크고 영원한 영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