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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14~19 뿌리와 터 2013. 1. 27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리스도가 어디에 계십니까? 성도의 마음에 계신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계시지 않고 밖에 계시다면 이것은 종교로 흐르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든 종교란 자신보다 능력이 많은 신에게 정성을 바쳐서 자신이 원하는 힘을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시면 사귐이 일어납니다. 사귐은 사귐 그 자체가 기쁘고 좋은 것이 됩니다. 남녀 간에도 사귐이 일어나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평소에 그렇지 않은데 갑자기 거울을 보고 옷과 외모에 신경을 쓴다면 사귐이 일어났거나 사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와 어떤 사귐이 있습니까?

 

요한 1서 1:1~4절입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한 것은 사도들과 사귐을 가지는 것인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합니다. 사귐과 누림에 종교적인 거래가 들어설 자리는 없습니다. 이것을 전함이 사도들의 기쁨입니다.

 

이러한 사귐이 시작된 자들에게 더 풍성한 사귐을 하라는 것이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속사람이 성령으로 강건하여 지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고 이제 그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17절을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계시도록 기도하는데 그 내용이 두 가지입니다.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입니다. 뿌리가 박힌다는 말은 나무가 심어지는 것을 비유로 말하며 터가 굳어지는 것은 건물의 기초가 더욱 단단해 지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사랑가운데 뿌리가 박히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에 계시고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내가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려고 하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가끔씩 송유관을 뚫고서 기름을 빼내어 파는 도둑들이 뉴스에 나옵니다. 송유관이 지나가는 근처의 농가나 주유소를 구입하여 지하 땅굴을 파서 송유관에 작은 구멍을 내고 기름을 뽑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둑질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우리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그의 사랑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박고 견고하게 자라는 것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요구하기 것이 아니라 그 놀라운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충만하여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환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여러 가지 원인을 들지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빠름입니다. 얼마나 빠른지 외국인 바이어가 새로운 옷을 하나 주문하면 저녁에 주문하는데 새벽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는 장점이 될 수 있지만 신앙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이란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비바람을 견디며 자라듯이 생명의 자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문화는 교회에서조차 빠름의 문화가 대세를 이룹니다. 처음 교회 나온 사람이라도 교육하면 일 년 만에 재생산 해 내는 사람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쉴 곳이 없습니다. 세상이 빨리 빨리하는데 교회도 빨리하라는 문화로 인하여 쉴 수가 없으니 교회보다 오히려 세상이 힐링을 들고 나옵니다.

 

그러나 참된 힐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개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에스겔 47장의 성전에서 나오는 생명수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예레미야 2:13절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은 생수의 근원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 웅덩이는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오늘 말씀에 비추어보면 우리의 뿌리를 그리스도에게 두어야 하는데 세상의 욕망에 그 뿌리를 두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우리의 뿌리가 잘려서 그리스도에 접붙임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11:17~18절입니다.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우리는 돌 감람나무입니다. 그런데 참 감람나무에게서 가지 얼마나 잘려나갔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때가 되기까지 유대인들이 잘린 것입니다. 그 자리에 이방인인 우리가 접붙임을 받아서 그 뿌리로부터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우리를 보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8~19절을 봅니다. 능히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한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의 그 충만하심을 알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많이 해 드리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짐으로 더욱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함을 알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일 시켜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지식에 넘치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지식이라는 것은 인과율적인 사랑입니다. 물론 부모님의 사랑을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도 하지만 그러나 자기 자식이기에 사랑한다면 그것은 도둑놈들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은 선악과를 따 먹은 지식입니다. 하나님도 아닌 주제에 사탄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은 그 특징들이 우리 안에 그대로 있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 자신이 선과 악의 주체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만이 나를 중심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조차 내가 정성 바친 만큼 도움을 주지 않으면 나쁜 하나님으로 대드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에 모셔 들여올 수가 있겠습니까? 금요일 성경공부에서 본 것처럼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은 그 마음에 하나님두기를 싫어합니다. 자신이 주가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들만이 듣고 믿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그리스도가 나무처럼 심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심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심어지는 것이 함께 일어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와서 자리 잡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20절을 봅니다. “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 놀라운 일이 성령을 통하여 성도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령이 임한 자는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계심을 압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 사랑의 충만함으로 충만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터가 견고하여 지는 것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이미 에베소서 2:20절에서 보았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터를 닦아 두었습니다. 그 터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앞에서 보았던 사랑가운데 뿌리가 박히는 것이나 터가 견고하여 지는 것을 동시에 말씀하는 부분을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5~11절입니다.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밭과 집을 동시에 이야기하기 때문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과 집의 터를 닦아 둔 것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밭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밭이기에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다 한 사역자인데 나는 누구 편이라고 편이 나누어지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터라는 말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그 터가 견고하여 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위에 세워진 집이기에 그 터가 영원하고 견고하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죄인인 사람의 마음의 오신다고 합니다. 그리하고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자신의 거처로 만들어내시겠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또한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고 그리스도에 터를 잡고 자신의 인생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자아가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자존심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뿌리를 내리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이러한 자의 모습을 로이드 존스는 프랑스의 신교도인 데오드로 모노의 글로 소개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부끄러운 슬픔의 시간이 있었네 내가 구주의 연민을 무시하고서 거만하게 대답하였네 “내 마음속엔 오직 나 자신뿐 당신은 조금도 없네” 그분께서 나를 발견하셨고 내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보았네. 그의 기도 소리를 들어보니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욕심이 가득한 나의 마음은 힘없이 고백하네. “내 마음의 일부는 나의 것이고 나머지 일부는 당신의 것입니다” 매일매일 그의 다정한 자비와 치료하심과 도와주심과 채워주심과 자유롭게 하심과 사랑하심과 강건하게 하심과 인내하심이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 이렇게 고백하게 하시네. “자아는 점점 사라져 가고 주님이 더욱 지배하시네!” 지극히 높은 하늘보다 더 높으시고 가장 깊은 바다보다 더 깊으신 주님, 당신의 사랑이 드디어 승리하셨네. 지금 나의 기도 소리를 들어주소서. “이제 나는 없어지고 주님은 온전히 나를 지배하시네!” 우리 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면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은 온전한 그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사랑의 충만함으로 충만하게 하시고야 마실 분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 분과 더욱 깊은 사귐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나와 세상이 간 곳이 없고 구속하신 주님만 보여 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