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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14~19 지식에 넘치는 사랑 2013. 2. 7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고 터가 견고하게 되기를 바울사도는 기도하였습니다. 나무의 뿌리가 견고하게 내리면 크게 자랄 수가 있습니다. 뿌리를 깊고 넓게 잘 박히면 그 만큼 옆으로 위로 자랄 수가 있습니다. 터도 견고해야 건물을 튼튼하게 세울 수가 있습니다. 이런 비유를 통하여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기도의 내용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광대함을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지식에 넘친다는 것은 지식을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지식이란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기 중심적인 가치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이 사랑이라고 하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이기적인 사랑을 생각합니다. 혹 이타적인 사랑을 하는 자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자기의 보람과 우월감을 맛보게 됩니다. 이런 사랑은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7:6~8절입니다.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민 중에서 택하신 것은 그들의 자격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선택하셨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의무가 주어집니다.

 

9~11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기에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면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지만 그를 미워하면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시내산 앞에서 벌써 멸망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31:1~3절입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3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언약의 목표는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바탕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시기에 그들에게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전에 성경에서는 무궁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31:31~33절입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옛 언약은 돌 판에 기록이 되었지만 새 언약은 마음에 기록을 하신다고 합니다. 이 새 언약을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십니다.

 

고린도전서 11:23~26절입니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새 언약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로마서 5:8~11절입니다.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 우리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 아들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랑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을 사랑으로 여깁니다. 우리의 지식은 이기적인 자기 사랑 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이미 다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 것입니다.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을 때의 그 유혹이 그들 안에 작동을 하고 있기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채워지는 것을 사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선악과 때 먹은 그 지식으로 알고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투정을 들어보겠습니다.

 

말라기 1:1~5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제가 종종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랑한다고 하시자 당장 원망이 쏟아집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우리 꼴이 이렇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업이 잘 되어서 고향에 가서 한턱 크게 쓰고 칭찬을 받는데 나는 사업이 망해서 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이런 식의 항의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답변은 내가 에서는 야곱의 형이지만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움을 받은 에서는 하나님께서 무너뜨리는데 그들은 스스로 다시 쌓습니다. 불굴의 정신으로 다시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에서는 아브라함보다 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야곱은 어떻습니까? 야곱도 불굴의 정신으로 자기 성공을 향하여 불철주야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내도 자식도 재산도 좀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그의 환도 뼈를 쳐서 장애인으로 만드시고 그의 딸과 아들의 험악한 꼴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 직전에 하나의 고백을 하고 죽습니다. 그것은 손자를 축복 하면서 손을 어긋맞게 축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의 뜻과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임을 알고 죽습니다.

 

로마서 9:10~16절입니다.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의 지식은 내가 원하고 달음박질 하면 무언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기에 무언가 내가 얻어내려면 그만큼 노력을 해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협상하는 기술도 배웁니다. 국제적인 문제는 국제협상가가 있습니다. 신에게서 무엇을 얻어 내려면 신을 잘 안다는 신학한 사람들을 찾습니다. 절에서도 스님을 찾는 것은 그들이 신이라고 여기는 대상에게 무언가 얻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지식의 한계입니다. 주고받는 거래입니다. 그러므로 복음보다는 종교적인 거래가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정성 바쳐 복 받자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은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달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받는 사람은 이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지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아가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편 139:1~6절을 봅니다.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여호와의 자기 백성을 아시고 돌보심에 있어서 너무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식이 너무 기이하고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한다고 찬양합니다.

 

이어지는 7~12절입니다. “봉독”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를 봅니다.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높은 곳에 거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 앞입니다. 세상의 높은 곳만이 아니라 영적인 부분에서도 높은 고지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그곳이 하나님 앞입니다. 때로는 무덤처럼 가라앉아서 나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고 여기는 그 깊고 깊은 심연에도 주님은 거기 계십니다. 넓고 넓은 바다 끝에 거주할 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흑암 속에 들어가서 흑암이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고 하여도 주에게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잠이 낮과 같이 비추이고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피하여 갈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넓고 길고 높고 깊은 그 사랑을 우리의 지식에 넘치는 그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알아가고 맛보아 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