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에베소서 3:14~19 그 사랑의 어떠함을 2013. 2. 24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지난주 제일 끝에 본 말씀이 요한 1서 4: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세상에서 말하는 수많은 사랑들은 사랑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타적인 사랑이라고 하는 것들도 있지만 그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자기의 영광을 위한 행위들이기에 참된 사랑은 아닙니다. 이런 사랑이란 다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시면서 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 성경공부를 마치고 윤 집사님의 카페 개업한 곳에 몇 분과 함께 갔습니다. 그 바로 옆에 제가 전도사로 있었던 교회가 있습니다. 그곳에 집사님들과 함께 잠시 들렸는데 마침 제가 주일학교 담당할 때에 교사로 있었던 분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권사님이신데 올 해 강렬하게 찾고 구하고 두드린다고 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니 자기 딸이 33세인데 시집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주일학교 전도사 때 초등학생이었는데 지금 서울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인데 전문의 마치고 펠로우 과정 2년차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제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가 하면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을 주시지만 그 좋은 것이란 성령이신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딸이 시집을 가고 안가고의 문제가 아니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는데 하는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면 딸이 시집가고 안 가고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주를 기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딸이 시집가는 것도 괜찮지만 시집가지 않는 것은 더 잘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시집을 가든지 안 가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도록 찾고 구하고 두드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33세에 돌아가셨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택한 자기 백성들에게는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야 마십니다. 그리하여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게 하십니다. 우선 시편 139편을 봅니다. 몇 주 전에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이 본문을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하였기에 오늘 다시 말씀드립니다. 시편 139편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편재하심을 찬양하는 내용이지만 저는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로도 읽었습니다.

 

먼저 1~5절을 봅니다.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어떤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손길에서 피할 수가 없습니다. 13절에서는 모태에서 나를 지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전지전능하심이 부담스럽습니까? 아니면 기쁘고 즐겁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기쁘고 즐거울 것입니다. 그런데 적당하게 세상의 일락을 사랑하는 자들은 이 말씀이 너무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히 타협하려고 합니다. 내가 일요일은 교회 나와 주고 내 소득의 십분의 일 정도는 낼 수 있지만 나를 너무 자세히는 살펴보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 다 아시는 주님 앞에 사는 것이 기쁘고 즐거운 것이 아니라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게 여기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도 아내도 어느 정도 비밀을 지켜주어야 부부관계가 원만하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너무 알려고 하면 다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적당하게 눈감아주고 알아도 모른 체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야 숨을 좀 쉰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살펴보시면 우리는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이런 하나님이 없다면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서울 서머나 교회 김성수 목사님은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를 찾으면 마음에 쉼이 있겠다고 생각하여 불경도 공부하고 동양학도 깊이 있게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 없다는 증거를 찾기 위하여 또 다른 곳에도 진리가 있다는 것을 찾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한 만큼 성경을 공부하였는가 생각하여 다시 성경을 보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런 생각들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가려고 합니다.

 

7~12절입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저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로 보입니다. 물론 시편 기자는 가정으로 말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이렇게 도망하려고 합니다.

 

여호와를 피하여 도망가려고 하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아주 높은 곳으로 가면 피할 수 있습니까?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이 높은 곳이 하늘만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높은 자리를 사람들은 원합니다. 사람들이 그 높은 자리에 가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합니다. 사람이 높아질수록 겸손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교만하여집니다. 선악과의 유혹은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자리를 펴고 앉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도 하나님 앞입니다.

 

스올은 음부 곧 무덤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이라고 여기는 그 깊은 곳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스올의 이야기는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에게 니느웨로 가서 이 성이 40일 후면 망한다고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앗수르의 수도였기에 만약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하여 버리면 하나님께서 긍휼이 많으시기에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용서 하시게 될까봐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제일 밑에 내려가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그 요나를 깨우시기 위하여 풍랑을 보내시고 배가 파선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들이 무역품들을 바다에 다 버리고 자기의 신들을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자 누구 까닭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걸린 것입니다. 요나가 자신 때문이라고 하면서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삼킵니다. 이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합니다.

 

요나서 2:1~6절입니다. “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스올은 음부라고 무덤의 자리를 말합니다.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기도하여 그 기도가 성전에 미치고 구원하여 내셨다고 합니다.

 

다시 시편 139편 7~12절을 봅니다. “봉독” 우리가 주의 영을 떠나 피할 곳이 없습니다. 하늘에 올라가도 그곳에 계시며 무덤에 내려갈지라도 그곳에 계시며 새벽 날개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인도하시고 주의 오른 손이 붙드십니다. 이제는 캄캄한 흑암 속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흑암이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낙과 같이 비추인다고 합니다. 주께서는 흑암과 빛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높은 곳이라고 가장 낮은 음부라고 할지라도 바다 끝이라고 할지라도 주의 전지전능한 눈길과 손길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사랑의 너비와 높이와 깊이와 길이로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랑을 완성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찾아 내셔서 구원하시는 일에 아무리 높은 곳이 있는 자라도 반드시 구원하여 내시고야 맙니다. 하늘같이 높이 된 자가 하나님처럼 살려고 하여도 하나님은 그를 끌어내리셔서 자신이 티끌임을 알게 하시는 사랑으로 구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무덤과 같은 절망의 자리라서 아골 골짜기와 같은 곳에 처할 지라도 그곳을 소망의 문으로 삼아주십니다.

 

호세아 2:14~16절을 봅니다. “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호세아와 음란한 여인 고멜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음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바람을 피우지 못하도록 가시로 막고 담으로 막아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심으로 본 남편에게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19~20절입니다.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시편과 요나서와 호세아서를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게 됩니다. 이 뿐 아니라 모든 성경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본질이 어떤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죄인 되어있을 때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을 때에 하나님 편에서 화목제물을 마련하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그 무엇도 없습니다.

 

로마서 8:28~30절입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서 사랑하셔서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이 세상에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음을 확인당하고 사는 삶이 예수 믿는 삶입니다(롬8:3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