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에베소서 3:14~19 충만하게 하시기를! 2013. 3. 3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회를 향한 두 번째 기도를 오늘과 다음 주에 이어서 마무리합니다.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기에 모든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상세하게 보는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기도하는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원하는 기도는 언제는 나를 중심으로 기도합니다. 나를 중심으로 바깥으로 동심원을 그려나가듯이 외연을 넓혀나갑니다. 그리하여 나라와 민족과 전 세계를 위하여 기도하여도 나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기도일 뿐입니다. 이런 자세로 기도하면 아무리 성경의 용어를 인용하여 사랑을 기도하여도 그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의 지식의 한계 내에서의 사랑일 뿐입니다.

 

오늘은 그 기도의 내용의 마무리로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한다는 내용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이 충만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그 영광의 모든 것들이 다 우리에게 충만하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다 담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19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충만함이란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충만함도로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성도 안에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완전히 이루어지는 충만함이란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성령으로 인하여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고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계셔서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더불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하여 몇 주간을 계속 말씀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사랑이 무엇인지 두곳의 말씀을 중심으로 봅니다.

 

요한일서 4:7~21절입니다. “봉독” 이 본문은 유명해서 노래로도 불러진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누구에게 속한 것입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서로 사랑하는 자가 나왔다면 이것은 하나님께로 나온 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지요!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내가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사랑하여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자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 이후의 생긴 인간의 선악의 지식입니다. 구약의 율법이나 신약이나 간에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 말씀을 우리가 스스로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좀 다닌 사람은 구약의 율법은 성령이 임하지 않아서 지킬 수 없었지만 신약에서는 성령이 임하셨기에 구약의 율법만이 아니라 신약의 모든 명령문도 지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신약의 서신서가 앞에서는 은혜를 전하고 뒷부분은 행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분에게는 이 본문을 보고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과연 당신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한 그 실천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 본문에서 비교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어지는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를 말씀합니다. 그 사랑이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사랑을 배척하고 그 사랑으로 오신 분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죄란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에게 정성을 바치고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 자신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그 아들의 희생과 성령이 임하심으로 되는 일입니다. 이런 자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성령으로 알게 됩니다. 이 결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고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며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십니다. 이런 자들은 심판 날에도 담대하게 됩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이 두려움이란 내가 하나님을 잘 못 섬겨서 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들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첫 타락 후에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왔다는 말씀을 금요일 성경 공부하였습니다. 그래서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첫 번째 목록이 두려워하는 자입니다(계21:8). 그러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두려움이 없이 사십니까?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온전히 이루는 것인데 이 사랑이란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하면서 보이는 바 그 형제도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보고 들으면 그래 나도 형제를 사랑해야지 하는데 그 사랑의 수준이라는 것인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라는 것도 자기의 전부가 백이라면 하나를 주고서 사랑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전부가 백이라면 백을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하여 죄송하다는 것이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16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한복음 3:16절을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요한일서 3:16절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아시기 바라며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1~13절입니다. “봉독” 요한일서의 사랑에 대한 말씀보다 더 유명한 말씀입니다. 한때 복음성가로 불러져서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가사가 좋다고 불렀던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도 사랑이라면 이런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자신이 실천은 하지 못하지만 공감은 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이런 사랑을 하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저의 죄인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시인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너는 언제 한번 남을 위하여 뜨거웠던 적이 있느냐고 하는 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이 말씀을 읽으면 어떤 사람으로 드러납니까?  

 

먼저 1~3절을 봅니다.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말을 하고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심지어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사랑이 없이도 자신의 모든 소유를 남에게 내어 줄 수도 있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 아닌 자신의 이념을 위하여서도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몸을 불사릅니다. 자신이 추종하는 사상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그러면 그렇게 한 자들이 그런 자들을 영웅으로 만듭니다.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가미가제 특공대들이 있었듯이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자살폭탄을 하는 자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티벳은 민족의 독립과 종교의 자유를 위하여 지난 3년간 50명이 넘게 분신자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과연 사랑인가요? 결국 이런 모습은 자아의 확대일 뿐입니다. 자기 사랑의 발로입니다. 제가 청년 때에 어느 선배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상과 이념을 위하여 몸을 불사르는데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가 하는 말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섞어질 세상의 것들을 위하여서도 모든 것을 내어놓는데 영원한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내어놓지 못하겠느냐고 아브라함은 백세에 낳은 아들도 바쳤다고 하면서 독려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들으면 여러분은 웃습니다. 바쳐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닌데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자기의 것을 전부 바쳐보시기 바랍니다. 물질도 시간도 몸도 다 바쳐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바쳤는데도 아무 것도 주시지 않아도 4~7절의 내용이 나오는지 점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10년을 죽도록 충성하였는데 아무른 보상이 없으니 이럴 바에야 무엇 하려고 하나님을 섬기는가 하는 분노가 일어나더랍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는 해결이 되는 것도 보았는데 나는 그 사람보다 더 열심히 하였는데 왜 나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해 주지 않는가 하는 반발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나의 이익을 위하여 신에게 정성을 바친 것이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4~7절입니다. 이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 한 가지만 보겠습니다. 첫째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전에 어떤 집사님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죄가 가득한 세상을 심판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때 이런 대답을 하였습니다. 바로 당신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래참고 계십니다. 만약 2년 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셨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도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을 다 찾아내시겠지만 주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됩니다.

 

베드로후서 3:1~18절을 봅니다. “봉독” 이 말씀이 왜 사랑과 연결이 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세상의 종말이 없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분노와 다툼과 요란함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야고보서 3:13~18절입니다. “봉독”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 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시기와 다툼을 일으키면서 땅위의 것들을 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욕의 것이며 귀신의 것입니다. 우리의 요란함과 분노와 시기와 다툼들이 어디서 오는 것임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심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5절입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주의 오래 참으심이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인 사랑이 충만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 3:18절에서 이렇게 증언 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이것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사람으로 만들어내시고야 마십니다. 그 과정은 우리를 부수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 넣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데반 집사처럼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과 사랑이 충만한 모습입니다. 이 은혜가 임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