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에베소서 3:14~19 충만(充滿) 2013. 3. 10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사도의 에베소 교회를 위한 두 번째 기도의 마무리입니다. 지난주에는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사랑을 주제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곧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하시고자 하시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부어지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충만함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언제나 나라는 허상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나의 몸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랑을 해체시키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 넣으시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상실, 삭제, 고난, 죽음으로 옵니다.

 

에베소서 1:23절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에베소서 1장에서 이 말씀을 보았습니다만 다시 한 번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충만함은 온 우주만물에 가득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들은 그 사실을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말은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있는 자는 결국 자기 생존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생존의 욕구만 밝히면 짐승이라고 말하면서 더 고상한 욕구들을 말하지만 그 또한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기에 자기 몸의 확장일 뿐입니다. 이런 모습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로마서 1:18~25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이유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나온 결과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지만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을 바꾼 것입니다.

 

이런 우상의 모습이 어떤 것입니까? 이런 우상은 형상물에 절하는 것만이 아니라 탐심이 우상입니다. 교회가 우상숭배를 안 한다고 하지만 탐심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 교회에 속한 사람들끼리도 각자의 하나님의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래 장례식장에서 고인을 화장하는 중에 점심을 먹는데 밥 생각이 없어서 그냥 앉아있었습니다. 어느 여자 분이 와서 입관예배 때 설교를 들었다며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에 열심이었는데 단 한 번도 이런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복음을 들으면서 자기 의가 무너지는 것이 너무나 큰 아픔이었지만 이제 복음이 무엇인지 눈뜨게 되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이 자꾸 나는 것은 자기를 걱정해서 나오는 눈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제가 옛날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학생부군신위’라는 오래된 영화입니다. 전통 장례를 재현하였다는 호평도 있었지만 박주사의 갑작스런 죽음과 장례의 과정을 그린 영화인데 그 장례에 모인 자들의 모습이 다양합니다. 아들과 딸들이 다 다르게 반응합니다. 한 아들은 교회 다닌다고 독경소리 나는 곳에서 찬송가를 부릅니다. 평소에 고인이 자주 다녔던 다방 아가씨들이 커피를 들고 와서 영전에 절하기도 합니다. 장례기간 4박 5일 동안 온갖 욕망들이 다 쏟아져 나옵니다. 장사하려고 하는 사람, 바람피우는 사람, 자기를 과시하는 사람, 울다가 먹다가 싸우다가 온갖 인간의 욕망들이 다 나오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릅니까? 갑자기 서머나 교회의 부탁을 받고 저와 정 목사님이 장례를 집례하기 위하여 올라갔습니다. 개척한지 만 1년, 교인이 약 9백 명이 모이는 곳에 갑자기 담임목사가 돌아갔습니다. 그곳에 가서 설교한번 하였다고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입관에서 발인과 화장과 납골당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마지막 납골당에 유골을 안치할 때에 설교를 하면서 방송인 김미화씨의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선배 방송인의 죽음 앞에 조사를 하는데 눈물은 아래로 흐르는데 숟가락은 위로 올라가더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해주던 귀한 목사님을 잃었다고 몇날 며칠을 울었겠지만 그러나 지금쯤은 지칠 것입니다. 그래서 얼른 씻고 좀 쉬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별수 없는 연약한 자들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각자의 욕망들은 그 자리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4:13절의 주 안에 죽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번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복이란 세상에서 얼마나 유명하며 성공하였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는데 그 주 안에서의 죽음이 어떤 모습입니까?

 

골로새서 2:11~15절입니다.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연합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연합되게 하시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무엇으로 충만해 집니까?

 

골로새서 2:8~10절입니다.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헛된 철학의 속임수나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십니다. 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기에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에베소서 4:7~16절입니다. “봉독”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그리스도의 분량대로 선물을 주십니다. 그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이루어집니다.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들을 사로잡아 내셔서 그들에게 선물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주신다고 합니다. 시편 68편에서는 선물을 받는다고 하였지만 바울은 오히려 선물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 선물이 주어지면 자신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에 은사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충만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사람 쪽에서 온갖 열심들을 다 내어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해 드리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만이 아니라 이단들도 그렇게 합니다. 온갖 이단들이 왜 그렇게 열심을 내는가 하면 다들 율법주의라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구원을 받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교묘한 교리들을 만들어서 영혼을 사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으로 예수님께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세상은 모르지만 교회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바르게 알고 있다면 온갖 율법주의나 신비주의나 사람의 행위에 가치를 두는 이론들에 미혹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됩니다.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 사람 말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 사람 말이 옳은 것 같은 이유는 은혜의 충만함에 이르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은혜위에 은혜여야 합니다.

 

이러한 충만을 성경전체의 흐름을 통하여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치를 창조하시고 그 천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함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고 만드신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우상숭배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자기의 영광의 충만함을 보여주십니다. 그 영광의 충만함을 보여주신 첫 째 자리가 구약의 성막입니다. 이 성막을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하셨기에 지혜를 가지고 성막을 만들어냅니다. 그리하여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하게 됩니다(출40:34).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이 성전이 구약에서 건물로 보여주셨지만 이것은 장차 오실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더 이상의 건물로 된 성전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며 하나님의 모든 신성과 그 영광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이 충만한 분을 세상은 전혀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자기 백성이라고 말한 이스라엘조차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진리의 영이 임하여야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1:14~16절입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증거 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진 그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한마디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 다 이루심을 성령을 통하여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 충만을 받는 것이 은혜위에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충만하게 받은 자들이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사도행전 7장에 보시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을 때에 그들은 이를 갈고 귀를 막으면서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진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갈 때에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합니다. 이것이 은혜와 진리와 성령이 충만한 모습입니다. 다른 사도들도 대동소이하게 이 길을 갔습니다. 이것이 충만함이며 복된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 안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작업이 들어갑니다. 우리 안에 있는 처음 아담의 속성들을 들추어냅니다.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한 그 모든 것들을 들추어내면서 그리스도가 자리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가 내려지고 터가 굳어져서 그 사랑의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사랑이라고 여긴 것들과 충만함이라고 여긴 것들과 좋은 것이라고 여긴 것들을 다 털어내십니다. 그 과정이 말씀의 검으로 발가벗겨지면서 상실, 삭제, 고난, 죽음을 통하여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가득 채워 넣으십니다. 그렇게 하셔서 정말 충만한 나라로 데리고 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