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에베소서 4:1~3 부르심 2013. 3. 24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많은 사람들이 바울서신의 앞부분은 교리이고 뒷부분은 교리에 따른 실천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1:1절에서 3:21절까지는 교리로 보고 4:1절에서 끝까지는 의무로 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서신은 모든 서신이 하나의 편지이기에 처음에는 이렇게 장절로 나누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획일적으로 나눌 수는 없습니다. 앞부분에도 권면이 있고 뒷부분 에서도 교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말들이 필요한가 하면 이런 구분에 의하여 신앙의 내용까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만이 아니라 바울서신 내용 전체를 볼 때에 앞부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어떤 일을 이루어내셨는가를 중심으로 말씀하고 있고 뒷부분은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실천해야 하는 그 주체성의 문제가 나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기에 다시 살아난 사람이 주도적으로 이루어가야 하는 문제인지 아니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로 다루시기에 우리는 그저 손 놓고 있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셔야 하는지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성화의 문제가 나옵니다. 성화(聖化)란 거룩하고 성스럽게 변화되고 고쳐진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로 보느냐 아니면 거듭난 사람이 힘써 이루어 가느냐의 싸움이 있습니다. 개혁주의 교단에 속한 사람들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것은 전적인 은혜임을 대부분 동의합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난 자가 거룩해 지는 것은 자신의 노력이 따라야 하는데 그 노력으로 다 안 되기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거듭난 이후의 주도권을 거듭난 자신이 가지게 됩니다.

 

이런 문제는 더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우리 주변의 일들을 생각하면서 두 가지로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그런 자는 반드시 생명의 현상이 나타나는데 어떻게 막 살자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여기에 반해 복음을 들으면 죄를 지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막 살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로마서 5:20~6:2절입니다.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20절을 보시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기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더 지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로마서 6:15~23절을 봅니다. “봉독”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더 지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고 6:1~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것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잘 못 알아듣기에 사람의 예대로 말하여 자기 지체를 누구에게 내어주느냐는 이야기를 합니다. 전에는 부정과 불법에 내어준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고 합니다. 그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여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거룩함에 이르는 결과가 영생인데 이것이 은사 곧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에 이르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보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전에 이런 논쟁이 한참이었을 때에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막살아야 한다.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받은 은혜대로 사세요. 저는 어느 말인 것 같습니까? 제가 정리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논쟁을 보고서 정리한 것인데 제가 아마 받은 은혜대로 사세요라는 식으로 보였나 봅니다. 그 사람이 잘 보았다고 봅니다. 저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은혜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받은 은혜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에베소서의 앞부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서 이루어주신 일입니다. 뒷부분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자기 백성에게 이루실 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묵시와 역사입니다. 묵시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어진 일이지만 이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에게 이루어내실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뒷부분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의 반항과 죄도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뒷부분도 하나님의 그 사랑의 충만함을 더 넘치도록 자기 백성에게 적용시키셔서 하나님의 뜻하시는 길로 이끌어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반항과 항복도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더 넘치도록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로 채우실 것입니다.

 

이제 4:1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단어 하나로 설교 한편을 합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에베소서 1:1절에서 3:21절까지의 전체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앞의 부분이 일어났기에 뒤의 부분도 반드시 따르는 것이지 이것을 분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분리할 수 없다는 말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므로 앞부분은 교리이고 뒷부분은 실천이라고 보기보다는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부분의 내용이 무엇인지 간략히 요약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신령한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드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우리가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또한 약속의 성령의 인침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바울은 기도하기를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그 힘의 강력한 능력으로 이루신 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구합니다.

 

그 능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인데 놀랍게도 성도를 여기에 함께 묶어서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전에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려내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한 새 사람을 만들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새로운 백성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거처가 되기 위하여 성전이 지어져 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주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이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바울사도가 너희를 권한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3:21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에게 이루신 일과 또 이루어 가실 일을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즉 묵시 안에서 이루어진 것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기를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이러한 충만함보다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러한 간구와 찬양의 내용이 자기 백성들에게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4:1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바울사도가 주 안에 갇혔다고 합니다. 주 안에 갇힌 바울이란 주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 지금 어디에 또 갇힌 것입니까?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 있다면 왜 감옥에 갇혀야하는지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고난을 봅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4~28)”

 

이런 고난을 받은 바울사도가 지금 감옥에 갇혀서 성도들에게 권하는 말이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것이 무엇인지 먼저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로는 결코 그 부르심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무엇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는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6~7절입니다.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은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구별되어 부르심을 받은 것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8:28~30절입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합니다. 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묵시 속에서 완료이지만 역사 속에서 진행형입니다.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은 너는 이제 그리스도의 것으로 이렇게 만들어져 가는 코스에 들어섰다는 말을 함으로 지금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위안을 주고 격려하면서 그 믿음의 길로 잘 가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6~31절을 봅니다. “봉독”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특징은 육체로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받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3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다음 주에 부르심에 합당한 삶에 대하여 더 보기로 하고 오늘은 왜 불러주셨는지를 몇 가지만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게 하시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도란 반드시 이 코스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술 취한 자와 같이 비틀거리지 말고 부르심의 목표를 똑 바로 보고 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