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에베소서 4:1~3 부르심에 합당하게 2013. 3. 24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지난주에 부르심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 부분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3장에서 부르신 이유를 보았습니다.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을 복을 주시기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 복이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에 자기 백성들을 성령으로 함께 묶으신 것입니다. 함께 연합이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새사람을 만들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3장은 우리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았다는 선언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일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분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반드시 그 부르심에 어울리는 사람을 만들어 내시고야 마신다는 하나님의 목표가 앞부분이라면 이제부터 그 매뉴얼대로 만들어 내신다는 실제적인 상황이 후반부가 됩니다. 이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실패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가 됩니다.

 

이사야 55:10~11절입니다. “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비가 내리면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땅을 적시고 소출을 내게 하듯이 여호와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천지만물이 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하십니다. 합당하다는 말은 어울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다시 살리심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어떤 반응과 증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창원의 벚꽃이 한창입니다. 봄이라서 꽃이 핍니다. 그러나 봄이라도 꽃이 피지 않는 나무가 있습니다. 어떤 나무입니까? 죽은 나무는 봄은 없습니다.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에게서는 부르심의 목표를 말해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반응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1~10절입니다. “봉독” 3절을 보시면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합니다. 10절에서는 전에 너희가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백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긍휼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이 바로 부르심을 입은 것이며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우신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서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각자의 인생에 단기적이고 장기적인 목표들 가운데 방금 읽어본 이런 목표들이 들어있습니까?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거저 우리는 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목적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뿐이지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부르셨는지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뜻대로 살아가면 늘 불평과 원망만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목적과 자신이 평소에 원하는 인생의 목표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 목적을 위하여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8:28~30절입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창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완료형으로 말씀합니다.

 

이것을 지난주에 묵시와 역사라는 말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계획하신 일을 말씀하셨기에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이 역사 속에서 만들어 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러므로 26절에서는 성령님이 성도 안에서 기도하시고 3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루어집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이루어집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옛 하늘과 옛 땅이 다 사라져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을 로마서 8:31~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봉독”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미 완료형입니다. 이러한 일을 이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에게 이루가시는 일에 그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아들이 지상에서 받은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러나 그 죽으심으로 인하여 부활의 영광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게 무엇을 주시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주십니다. 그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35~39절을 다시 봅니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됨,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예수님께 먼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반드시 이 코스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하게 이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로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면 이런 어려움들을 주지 않으시면 좋을 텐데 왜 이런 어려움들을 주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만 구원하여 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만 능력으로 보이고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여야 됩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이러한 일들이 닥치는 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한 필수코스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여긴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빌립보서 3:10~12절입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 바로 부활에 이르는 길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내가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바울을 잡아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로잡힌바 된 것을 잡기 위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전에는 반대로 달려가다가 이제 잡힌 그 목표로 갑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봅니다. “봉독”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합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한 행함이 어떤 것입니까? 일입니까? 성품적인 것입니까? 성품적인 것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를 말합니다. 성령이 성도 안에 오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면서 이루어내시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체적인 목록들은 무엇을 향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 됨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 됨이란 다음 주에 더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만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을 것을 말씀합니다. 3절을 보시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 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지키면 안 이루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배우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배워야 할 내용들이 성령의 열매로서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사항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반드시 이 코스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을 오늘날 교회에서 잘 말해 주지 않습니다. 간혹 말해주어도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여 맺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나온다면 그런 열매는 또 다른 시기와 경쟁과 질투라는 육체의 열매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열매가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외형적인 일들에 치우치게 합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업적들을 내 놓으라고 닦달을 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열매마저 우리의 행함의 열매로 바꾸어치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로는 일석이조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가시적인 업적들이 나와서 좋고 성령의 열매라는 말로 입을 다물게 해서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바로 회칠한 무덤입니다.

 

그러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납니까?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후에 우리가 평소에 피하고 싶은 내용들을 죽 보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인 환난을 봅니다. 사람이 언제 겸손해 집니까? 모든 것이 잘 되고 승승장구하면 자연스럽게 교만해 집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통하여 겸손하게 됩니다. 환난을 당하지 않으면 자기가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자기가 잘나서 그런 것 인줄 압니다.

 

환난만이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피하고 싶은 모든 일들이 다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온유하게 하고 오래참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환난이 오는 것에 대하여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은 남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우리가 피하고 싶은 사람과 환경들은 나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됩니다. 저 사람만 없었으면, 이 환경만 바뀌어 진다면,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것은 아직 자기 속에 있는 자아라는 우상이 깨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자아는 허상입니다. 그러함에도 죽을 때 까지 우리를 있음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이런 것들이 깨어지는 것은 결국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입니다(삼하7:14). 이것이 언약 백성들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복이며 사랑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덧입게 됩니다.

 

마태복음 11:28~30절입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자들이 마음의 쉼을 얻습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을 통하여 온유와 겸손을 배워가는 사람들이 부르심에 어울리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