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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14~19 그리스도의 사랑 2013. 2. 17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지난주에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 드렸습니다. 지식에 넘친다는 말은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의 지식이란 선악과 이후의 지식이기에 어떤 사랑을 말하여도 자신이 신 되고자 한 그 선악과의 지식이 들어있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수많은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나타난 사랑은 이런 세상의 지식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 저런 사랑이 다 가짜임을 드러내면서 사랑은 여기에 있다고 하신 것이 바로 우리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지난주에 듣지 못한 분이 많아서 반복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말라기 1:1~5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구약의 마지막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신 내용입니다. 그 경고의 내용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랑한다고 하시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장 원망이 쏟아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미약하게 되었는가 하는 항의가 나옵니다. 주일 오후에 보는 사사기의 기드온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이냐고 항의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것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업이 잘 되어서 고향에 가서 한턱 크게 쓰고 칭찬을 받는데 예수 믿는 나는 사업이 망해서 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냐는 항의입니다.

 

이런 항의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내가 에서는 야곱의 형이지만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움을 받은 에서는 하나님께서 무너뜨리는데 그들은 스스로 다시 쌓습니다. 불굴의 정신으로 다시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에서는 아브라함보다 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야곱은 어떻습니까? 야곱도 불굴의 정신으로 자기 성공을 향하여 불철주야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내도 자식도 재산도 좀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그의 환도 뼈를 쳐서 장애인으로 만드시고 그의 딸과 아들을 통하여 험악한 꼴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 직전에 하나의 고백을 하고 죽습니다. 그것은 손자를 축복 하면서 손을 어긋맞게 축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의 뜻과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임을 알고 죽습니다.

 

로마서 9:10~16절입니다.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의 지식은 내가 원하고 달음박질 하면 무언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기에 무언가 내가 얻어내려면 그만큼 노력을 해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협상하는 기술도 배웁니다. 국제적인 문제는 국제협상가가 있습니다. 신에게서 무엇을 얻어 내려면 신을 잘 안다는 신학한 사람들을 찾습니다. 절에서도 스님을 찾는 것은 그들이 신이라고 여기는 대상에게 무언가 얻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지식의 한계입니다. 주고받는 거래입니다. 그러므로 복음보다는 종교적인 거래가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정성 바쳐 복 받자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을 받는 것은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달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받는 사람은 이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지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아가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떠한지 성경의 몇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50:15~21절입니다. “봉독”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의 형제들이 염려가 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요셉이 그 형들을 미워하여 그 악을 갚지 않을까 염려한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하여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꾼 꿈은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게 될 것을 말하였기에 더욱 미워하다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온 요셉을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가 간접적으로 죽이기 위하여 은 이십에 노예로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기 가족을 살려낸 것입니다. 이제 야곱이 죽고 나자 형들이 옛날의 악행에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기를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가 믿는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여 달라고 합니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습니다. 형들이 아직 용서를 믿지 못하고 있는데 대한 울음이었습니다. 그러자 형들이 직접 찾아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서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라고 합니다. 요셉의 꿈이 이루어진 내용이지만 요셉의 그 꿈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희생으로 그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형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말라고 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고 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고 하였다는 말씀을 전하면서 당신의 자녀들까지 기르겠다고 하면서 간곡한 말로 위로합니다.

 

시편 105:16~19절입니다. “16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야곱의 때에 가나안에 기근을 들게 하셔서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신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양식이 있었다면 애굽에 내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근으로 양식이 끊어지게 하여 애굽으로 내려가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그 방법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방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겠습니다. 호세아 2:19~20절입니다.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취하라고 하십니다. 아이를 낳고 살다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버린 고멜을 값을 주고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방금 읽은 말씀입니다. 처음부터 음란한 여인인데 결혼하여 살면서도 바람을 피운 여인입니다. 간음은 율법만이 아니라 예수님도 말씀하신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이혼의 사유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인에게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장가드는 것을 통하여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합니다. 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임하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16:60~63절입니다. “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61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62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63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이 태어날 때부터 꺼림을 받아 씻지도 않고 탯줄도 자르지 않은 채 들판에 버려진 계집아이로 비유합니다. 그런 아이를 긍휼히 여겨서 살려놓았더니 온갖 우상숭배로 세월을 보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자를 다시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한 짓이라고는 반역과 우상숭배와 음행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으로 구원하여 내시는 길 외에는 달리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한 언약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아끼셨기에 그들을 구원하여 내신 것이라고 우리는 에스겔서에서 보았습니다. 구약의 이 모든 것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사랑하실 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31~35절입니다.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두들 버리지 않는다고 목숨을 건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6:69~75절을 봅니다. “봉독”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한 모습이 베드로에게 그대로 들어납니다. 세 번이나 맹세하며 저주하면서 그를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합니다. 그때 닭이 웁니다. 닭은 새벽이 되면 본능으로 울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날은 본성이 억제 당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하도록 기다리다가 세 번 부인하자 말자 닭이 울었습니다. 만물이 다 주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부인한 것을 알고 통곡합니다. 이런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후에 다시 찾아오십니다. 베드로가 비록 부인할지라도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신 주님입니다(눅22:32).

 

이 사랑을 바울사도가 계시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어떠한지 사도요한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요한1서 4: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세상의 사랑들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낸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