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에베소서 3:20~21 송영(頌榮) 2013. 3. 17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방금 읽은 이 말씀에 대하여 해설 성경을 보시는 분은 소제목으로 송영이라고 되어 있는 성경이 많을 것입니다. 송영(頌榮)이란 영광을 찬송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는 영광송(榮光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제가 예배 시작할 때에 찬양대 송영에 맞추어 묵상 기도함으로 예배 시작합니다. 하는 그 송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묵상 기도하느라 송영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하였지요! 찬양대의 송영만 들어보겠습니다(찬양대). 시작과 끝이 다 송영입니다. 이런 송영을 바울사도는 기도 후에 합니다.

 

그동안 오랫동안 본 바울의 두 번째 기도의 내용이 3:14~19절입니다. 기도를 마무리하면서 왜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이 나오겠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은혜의 충만함을 생각만 해도 찬양이 나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3절을 봅니다. “찬송하리로다” 에베소 교회에 인사말을 한 후에 본격적인 내용을 말하려고 하다가 찬송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인사말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시작하는데 찬송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찬양할 내용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들로 시작하여 두 번째 기도까지 하고 나니 다시 찬양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을 보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이게” 여기서 누가 주체가 됩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구하는 것 보다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신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를 주체로 놓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평소에 구하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변을 하십니까? 우리 아들이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으로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이 기다립니다. 그러면 다시 기도합니다. 공무원 시험이나 합격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능히 더 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기도하는 내용이 전부 내 잘되고 우리 자식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잘된다는 것이 영적인 것들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좋아하는 땅의 것들입니다.

 

금요일 이 건물 소유주 회의가 있었습니다. 3월의 총회를 준비하기 위한 모임을 바로 옆 건물의 횟집에서 가졌습니다. 그 횟집이 며칠간 초상으로 문을 닫았는데 그 주인의 아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공무원 합격하여 통영 항만 관리소에 발령을 받아 그곳에서 회식을 하고 동료를 바래다주러 나갔는데 다음날 출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색을 하였는데 2일 후에 바다의 오탁 방지 망에 걸려 사망했다고 합니다. 경찰도 실족사 한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어렵다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발령받고 기분 좋게 회식 한 후에 사망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모인 사람들에게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구하는 것들이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들이라면 그것을 이룬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구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의 차이를 보아야 합니다. 지금 바울사도가 교회를 위하여 구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가장 가깝게는 14~19절입니다. 한 번 더 보겠습니다. “봉독” 바울사도의 기도입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도록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런 충만하신 것보다 능히 더 넘치게 하실 이에게 찬송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설교제목을 ‘더 넘치도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체를 말씀드리기 위하여 ‘송영’이라고 고쳤습니다만 더 넘치도록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들보다 더 넘치게 주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면 올해 수입이 얼마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수입이 훨씬 많아졌다면 간증거리가 생겼다고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역시 더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세상의 사람들도 좋아하는 돈이라면 그 말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지 시편 73편 1~14절을 봅니다.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8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7절과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소원보다 소득이 많고 항상 평안합니다. 이들이 악인입니다. 그런데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자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구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면서 그런 악인의 형통을 구하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교회 다닌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런 것들을 구하고 생각하였으니 교회에서 간증이라고 하는 것들이 세상 사람들도 좋아하는 것들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존의 인디오들이 간증하는 내용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송영으로 한 그 내용, 즉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더 넘치도록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가장 가깝게 사랑임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의 지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주 받아 죽는 죽음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그 부르짖음을 하나님은 철저하게 외면하셨습니다. 이 죽음과 이 고통은 아무도 모르고 오직 예수님만 아는 죽음이며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 됨이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며 고통입니다. 이것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죽음과 고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십자가를 자기 사랑의 확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버림 받으심이 자기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한 버림받음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이 사랑을 알았습니다. 바울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는 이단의 괴수이며 그 예수 믿는 자들을 자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고 열심을 다하여 달려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 자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한량없음을 알아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4~7절입니다. “봉독”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반드시 위엣 것을 찾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속하여 살아가지만 그러나 반드시 땅에 것들에 대하여 실망하게 되고 위에 있는 것을 찾게 됩니다. 이러한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 보다 능히 더 넘치게 하시는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넘치도록 주신다는 몇 곳의 말씀을 봅니다. 누가복음 6:38절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흔히 구제가 헌금을 많이 하라는 말로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원수에게 사랑을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게 그 복음의 풍성함을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1~9절입니다. “봉독” 마게도냐 교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가 무엇인가 하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이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넘치는 기쁨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연보를 넘치게 하였다고 합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이 있는데 어떻게 넘치는 기쁨이 있고 극심한 가난으로 어떻게 넘치는 연보를 한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구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친다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그가 가난하게 되심으로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환경을 뛰어넘은 넘치는 기쁨과 넘치는 연보입니다.

 

디모데전서 1:12~17절입니다. “봉독” 무엇이 넘칩니까?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그 말씀에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17절에 송영이 나옵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송영의 특징은 끝에 아멘이 나옵니다.

 

송영 두 곳을 더 봅니다. 로마서 16:25~27절입니다.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유다서 24~25절입니다.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끝으로 오늘 본문의 21절입니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교회와 그리스도를 함께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무궁한 곳입니다.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영광보다 더 넘치는 영광이 영원무궁할 것입니다. 그 영광의 비밀이 그리스도입니다(골1:27, 2:2,3).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영광의 비밀인 그리스도로 충만해 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