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24:9-18 식탁 복음    2010. 12. 26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 판을 네게 주리라 13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14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 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 15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2010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마지막이 있다는 것이 두렵습니까? 감사할 일입니까? 마지막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터부시 할 정도로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마지막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마지막이라는 말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은 그들을 종말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2:29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자기들이 왜 패배를 당하였는지를 깨달을 지혜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종말이 어떻게 될지, 깨닫기만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종말을 알고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면 종말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을 잔치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시하고 자기의 배만 평생에 섬긴 자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종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종말을 알고 있다면 잠시 있다 사라질 것, 헛된 것, 우리의 배만 섬기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평생을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미 종말을 알기에 올 한해가 어떠하든지 그 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의 잔치를 지금 맛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피를 뿌려 언약을 맺고서는 이스라엘의 대표인 장로 칠십 명이 시내산 가까이 올라가서 하나님을 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뵙고서는 살 수가 없는데 어떻게 이들이 하나님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까? 방금 피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피 뿌림이 있기에 하나님을 뵐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뵐 수는 없습니다. 보면 죽습니다(출33:20). 그러므로 모세조차 하나님의 등을 보았다고 표현합니다(출33:23). 그러므로 백성의 대표들이 하나님의 발치만 보았던 것입니다.

 

10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발 앞에 푸른 옥을 편 듯하고 바다같이 청명하더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4:6절에서는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계시고 그 발 앞에 앉아있는데 그 발이 땅을 밟고 있는 것과 같은 이미지입니다. 이사야 66: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여기의 발판이 발등상이라고 표현되는 이 땅입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가장 높고 거룩한 장소가 하나님의 발등상 앞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7장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 집사가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가지고 사람이 지은 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서 이것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 그들의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슬러 의인이 오시리라고 예고한 자들을 죽인 것 같이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죽인자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이 달려들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 땅이 하나님의 발등상이 되시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주 화요일에 조카가 전화가 왔습니다. 기말시험을 준비하는데 저와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부산대 3학년인데 교양과목 선택이 ‘서양의 문화와 영화’인가 그렇습니다. 그 교수가 내어준 과제가 그룹별로 ‘시대정신’이라는 영화를 보고 비판과 반론을 하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터넷 검색하시면 나오는데 두 시간 넘는 다큐 형식인데 기독교라는 종교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그리고 폭력과 테러 등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찾아서 보았습니다. 방대한 내용이라 다 말할 수는 없고 한 장면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영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만화로 신을 조롱하는 내용을 그려 놓았습니다. 하늘에 있는 신이 인간의 돈을 좋아해서 하늘에 가득 쌓아두는 만화를 보여줍니다. 저는 이것을 시작으로 조카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 영화가 나온 것은 오늘날 기독교라고 이름 하는 종교가 성경에서 벗어났기에 그런 조롱의 영화가 나왔다고 하면서 인간이 왜 참된 신을 왜 섬길 수가 없는지를 인터뷰와 함께 약 두 시간 정도 전했습니다.

 

그 중에 한 말씀만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7:23-25절입니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바울사도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전한 내용입니다.

 

지금도 즐비하게 있는 고대의 신전들이 가득한 곳이 그리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이라면 얼마나 번성한 신전들이었겠습니까? 그런 신전 중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도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제단이 있겠습니까? 내가 아는 신들은 섬기겠는데 혹시 알지 못하고 섬기지 못하였다고 섭섭해서 인간에게 해코지를 하는 그런 신이 있다면 이 제단에 와서 섬김을 받아서 벌을 주지 말고 복을 주기 원하는 종교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범사에 종교성이 많다고 하면서 이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신은 사람이 지은 전에 계시지 않고 섬김을 받지도 않고 도리어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라고 증거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를 유대인들에게 한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사도행전 7:48-53절입니다. “봉독” 이사야 66:1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건물 성전을 고수하느라고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인 것을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의인이 오시리라고 예언한 선지자들을 핍박하더니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다고 하자 그들이 이를 갈면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방인의 종교성보다 더한 종교성을 가진 자들이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은 참된 하나님을 섬긴다고 여긴 자들입니다.

 

그러나 누가 참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습니까? 그 얼굴만 보아도 죽어야 하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수가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사야 40:12-18절을 봅니다. “봉독”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릴 수가 있으며 하늘을 뼘으로 잴 수가 있습니까?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며 그의 모사가 될 수가 있습니까?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을 작은 티끌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열방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비교하며 섬기겠느냐는 말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상상하여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우상숭배임을 이어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발등상 앞에서 지금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피로 맺은 언약이 체결되고 나서 언약의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의 현장입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 나아가기만 하여도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 너무나 두려워서 가까이 가기도 두려워 모세에게 대신 말씀을 전하여 달라고 한 두려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의 현장입니다.

 

이 기간은 12-18절에서 보면 7일정도로 보입니다. 모세가 장로들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 까지 기다리라고 하지만 백성들의 송사문제가 있으면 아론과 훌에게 나아가라고 한 것을 보면 40일 동안 있은 것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16절에서 보시면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 째 날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불러 구름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때에 장로들은 내려가고 여호수아만 모세 근처에 남아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40일 동안 여호와 앞에서 있었던 기간에 이들이 내려가서 금송아지를 만든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참으로 크고 두렵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 먹고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언약의 피 때문입니다. 11절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백성의 대표들이라고 존귀한 자라고 하였지만 그러나 그보다 언약의 피 뿌림을 입었기에 존귀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손을 대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대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대지 않으심으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언약의 피를 보신 것입니다.

 

사무엘하 9:6-8절을 봅니다. “6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다윗과 사울은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사울이 죽고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때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이 므비보셋을 찾아서 사울의 모든 밭은 다 돌려주고 왕의 상에서 식사를 하도록 합니다. 므비보셋은 전쟁 중에 유모가 피난 가다가 다리를 다쳐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왕의 정적은 살려두면 안 됩니다. 9족을 멸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단과 다윗 사이에 생명으로 한 언약이 있습니다. 그 언약대로 므비보셋을 살려줄 뿐 아니라 왕의 식탁에 앉게 하니 므비보셋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이것이 왕의 식탁에 초대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7:21-28절입니다. “봉독” 여인의 간청에 예수님께서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성가셔서 저 여자를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자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구하러 왔다고 합니다. 여자가 또 간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보시고 믿음이 크다고 하십니다. 믿음이 큰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신은 주인의 상에 참여할 수가 없고 개와 같은 자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여인을 예수님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을 고발하고 있으며 오늘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입니까? 종교성입니다. 종교성은 반드시 자기의 공로사상이 나오게 됩니다. 신과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을 개로 여길 수가 없습니다. 내가 누군데! 내가 무엇을 했는데! 이런 것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예수님의 식탁에서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식탁에 초대된 사람들을 보고 눈을 흘기고 욕을 하면서 예수님을 향하여 술을 즐기고 먹기를 탐하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식탁에 초대된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은 지금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 잔치를 마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피를 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잔이 바로 자신의 살과 피 임을 말씀하시면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개같이 여김을 받는 이방인인 우리까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만들어진 그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만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임을 므비보셋의 심정으로, 가나안 여인의 심정으로, 세리와 죄인과 창기의 심정으로 먹고 마시는 거룩한 식탁의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이 거룩한 식탁에 초대된 것만으로 영원히 감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