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21:28-36 소가 사람을 죽이면 2010. 10. 17

 

28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일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29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말미암아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30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부과하면 무릇 그 명령한 것을 생명의 대가로 낼 것이요 31 아들을 받든지 딸을 받든지 이 법규대로 그 임자에게 행할 것이며 32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 33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아니하므로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지면 34 그 구덩이 주인이 잘 보상하여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줄 것이요 죽은 것은 그가 차지할 것이니라 35 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 죽이면 살아 있는 소를 팔아 그 값을 반으로 나누고 또한 죽은 것도 반으로 나누려니와 36 그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는 줄을 알고도 그 임자가 단속하지 아니하였으면 그는 소로 소를 갚을 것이요 죽은 것은 그가 차지할지니라

 

오늘 말씀은 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농촌에서 소를 기르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아직 유효하게 보이지만 도시에서 이런 말씀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우리의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도 결국은 나와의 이해관계에 얽혀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마치 대형쇼핑센터에서 카터에 자기 필요한 것들만 담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마을에 이준씨가 초등학교 2학년의 시를 한편 소개하였습니다. 제목이 ‘아빠는 왜?’ 입니다. “엄마가 있어서 좋다/ 나를 이뻐해 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 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이 아이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나에게 도움과 이익이 되는 것에 존재의 이유를 긍정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별 도움이 안 되는 아빠, 사실은 아빠가 돈을 벌어다주기 바빠서 예뻐해 주지도 않고, 먹을 것도 주지 않고, 놀아주지도 않는데도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런 아이가 그대로 자라서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됩니다. 이런 청년과 어른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성경은 왜 있고 하나님은 왜 있는 거야? 소 이야기는 왜 하는 거야? 이럴 것입니다.

 

저도 이 본문을 보면서 고민을 좀 했습니다. 우선 이 본문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보기 전에 지금 우리가 보는 말씀이 성경에서 어디에 있는지를 넓게 한번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출애굽기를 봅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만 부각이 되는데 그 보다 더 큰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창세기부터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은 씨와 땅에 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가나안 땅에 왔지만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아브라함의 땅은 한 평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당장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른 나라에서 살다가 4대만에 차지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아브라함의 씨를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사라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속은 주어졌고 약속대로 이삭이 태어납니다. 이삭의 아들이 야곱입니다.

 

야곱과 그의 자손 70명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애굽에서 430년을 지내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납니다. 장년만 60만 명이 되었을 때에 씨가 완성이 되고 또 약속하신 때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십니다. 씨가 다 마련되었기에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담아내는 그릇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출애굽하여 시내산 앞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언약을 체결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신부요 하나님은 신랑의 모습으로 언약을 체결합니다.

 

모세는 중매쟁이 역할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이 옷을 빨고 정결하게 하여 기다립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백성들이 듣는 것은 모세의 말을 영영히 믿게 하려고 그렇게 하십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동의를 합니다. 그 언약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23장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언약의 내용들은 무엇을 담아야 합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땅과 씨를 차지하는 것을 포함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는 주로 씨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특히 민수기는 아예 백성들의 숫자를 40년간 두 번에 걸쳐 헤아리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과 다른 언약들이 하나님의 씨를 보호하여야 한다는 뜻을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것도 단지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나오는 법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씨에 대한 보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들을 보면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씨에 대한 보호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눈에는 눈 이라는 동태복수법도 과도한 복수심으로 다른 씨에 대하여 보복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소가 사람을 받아서 죽이면 그 소를 반드시 죽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씨에 대한 보호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소에 대한 임자의 책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28절입니다.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고의로 죽인 자도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소도 그렇게 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소의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주인은 형벌을 면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소는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에 해당합니다. 그런 소가 사람의 피를 흘렸기에 반드시 죽이도록 합니다(창9:5).

 

29-32절입니다.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는데도 주신이 단속을 하지 않아서 남녀를 막론하고 받아 죽였다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며 그 소의 임자도 죽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죽임을 당한 가족이 속죄금을 내게 하면 무릇 그 명령한 것을 생명의 대가로 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소가 아들이나 딸을 받아 죽이면 같은 규례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종을 받아서 죽게 되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주게 합니다. 종의 몸값이 은 삼 십 세겔이기에 그렇게 하지만 그 소는 돌로 쳐 죽이게 합니다.

 

33-34절은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 두거나 또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않음으로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지면 그 구덩이 주인이 잘 보상하여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줄 것이요 죽은 것은 그가 차지할 것이라고 합니다. 구덩이를 파는 것은 곡식을 저장하기 위하여 판 구덩이 일 것입니다. 그런 구덩이를 방치하여 두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다가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지금 4대강 공사를 한다고 강을 다 파고 있는데 공사 전에 유물조사를 위하여 낙동강 강 옆을 조사하니 건축쓰레기와 산업폐기물이 엄청나게 묻혀 있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강변 습지를 복토하여 준다고 하고서는 그곳에 쓰레기를 묻고 위에 흙으로 덮은 것입니다.

 

이것은 구덩이를 방치한 것보다 더 악한 모습입니다. 그 폐기물에서 흘러나온 것이 다 강으로 흘러가고 우리가 마시는 수돗물이 됩니다. 이런 일을 한 사람들 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없을까요? 그리고 독일에서 우리나라처럼 강을 인공적으로 공사하였다가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고 다시 자연 상태로 돌리는 일에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포클레인으로 강을 팠으면 제대로 잘 마무리하여야 합니다. 이것으로 다른 피해가 온다면 구덩이를 판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35-36절은 소가 다른 소를 받아 죽이면 살아있는 소를 팔아서 반으로 나누고 죽은 소도 반으로 나누게 합니다. 그런데 받는 버릇이 있는 소를 단속하지 아니하여 그런 일이 일어나면 소로 소를 갚고 죽은 것은 단속하지 아니한 사람이 차지하게 합니다. 이런 법들은 재산에 손해 배상의 법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이 시대에 적용하자면 나의 소유물로 인하여 남에게 피해를 입도록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만 본다면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법이 아니라 거저 세상의 손해배상법밖에 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9:9-10절입니다.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신명기 25:4절의 말씀을 소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대가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딤전5:18). 그러나 복음을 위하여 사도는 그 권리마저 포기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과 직접 연결하기는 무리가 옵니다. 그러면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이면 그 소를 반드시 죽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이 본문에 대하여 고민을 하다가 이사야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사야 1:2-3절입니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자라게 하였거늘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소나 나귀는 주인을 알아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어 그들을 양육하였는데 그들이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신부로 삼으시기 위하여 택하여 내신 백성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 언약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 가나안 땅에서 평안하게 살 수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 법들을 다 지키겠다고 동의를 하였습니다. 언약 체결에서 증인을 세우는데 하늘과 땅도 증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면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는 것입니다. 소도 나귀도 주인을 아는데 이 백성은 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소나 나귀가 주인의 말을 잘 듣는데 그런데 그 중에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사람을 죽이면 반드시 돌로 쳐 죽이고 다른 짐승을 죽이면 배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만드신 주인을 사람이 배신하면 당연히 죽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씨를 보호하시는데 짐승이 죽이면 짐승을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씨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을 보호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씨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바로 왕에게 자기 아내를 자기 여동생이라고 하면서 넘겨주어도 하나님께서 사라를 보호하여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씨에 대한 보호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씨는 바로 이삭입니다. 약속으로 태어난 자식입니다. 그러나 그 이삭도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씨에 대하여서 갈라디아서 3:16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여기의 네 자손이라는 말이 바로 씨라는 말입니다. 그 씨, 약속의 씨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자기의 땅에 왔지만 사람들이 주인을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이방인의 힘까지 동원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이면 그 소를 반드시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이제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돌로 쳐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자신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이 임하여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왜 필요한지를 압니다. 자기의 목숨보다 더 귀한 분임을 압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저주가(갈3:13) 자신의 저주임을 압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사하며 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