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21:7-11 여종의 규례 2010. 9. 26

 

7 사람이 자기의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할 지며 8 만일 상전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여 상관하지 아니하면 그를 속량하게 할 것이나 상전이 그 여자를 속인 것이 되었으니 외국인에게는 팔지 못할 것이요 9 만일 그를 자기 아들에게 주기로 하였으면 그를 딸 같이 대우할 것이요 10 만일 상전이 다른 여자에게 장가들지라도 그 여자의 음식과 의복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말 것이요 11 그가 이 세 가지를 시행하지 아니하면, 여자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할 것이니라

 

지난주에 남종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남자가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렸다면 그 빚이 얼마이든지 간에 6년을 일한 후에 7년째는 자유를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이 주인과 처자식을 사랑하여 나가기 싫다고 하면 귀를 뚫어서 영원한 주인의 종이 되겠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왜 종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까? 너희가 전에 애굽의 종이었는데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으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의 정신이 이스라엘에 흐르게 하기 위하여 6년 일한 종에게 7년째 안식을 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명령하실 수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자유를 얻어 나온 것은 하나님의 종, 품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율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그들의 삶에 강물처럼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품꾼임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욕망을 따라 살아갔기에 종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어 버립니다. 그 결과 그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멸망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서 구원이 일어나는 것은 스스로 종의 자리로 가신 예수님 때문임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종에 대한 부분입니다. 왜 남종과 여종을 구별하는 것입니까? 남종은 노동력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여종은 노동력의 문제만이 아니라 성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이라도 구별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종처럼 여종도 6년을 지나고 나서 7년째 자유를 주어서 내어보내면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고대의 종이란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인 하갈이나 레아와 라헬의 여종인 실바와 빌하도 주인이 자식 얻기 위하여 남편에게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 종으로 팔렸다면 단지 노동력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문제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7절을 봅니다. 사람이 자기의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같이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나오지 못한다는 것은 강제적으로 잡아둔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여자를 종으로 사는 것은 자신의 아내나 첩으로 삼으려고 하거나 아니면 아들의 아내로 주기 위하여 사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전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여 상관하지 아니하면 그를 속량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15장에서는 여종도 6년을 섬기면 자유를 주게 합니다. 그러나 여종이 주인을 사랑하여 함께 거하려면 남종처럼 귀를 뚫으면 됩니다. 그런데 신명기는 일반적인 종에 대한 규례이지만 출애굽기는 아내를 삼거나 며느리를 삼고자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8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주인이 아내로 삼으려고 그 여자를 샀으나,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는 그 여자에게 몸값을 얹어서 그 여자의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내야 한다. 그가 그 여자를 속인 것이므로, 그 여자를 외국 사람에게 팔아서는 안 된다.” 여종을 사오는 것은 아내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여자에게 몸값을 얹어서 그 여자의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야 하고 이방인에게 팔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 여인은 종으로 더 팔리지 않고 자기 아버지 집에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를 사 올 때는 주인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여 종을 자기 아들에게 아내로 주고자 샀다면 그를 딸 같이 대우하라고 합니다. 여종을 딸의 지위와 같이 대우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도 이 여인에게 의무를 다 하라고 합니다. 그 의무란 음식과 의복과 동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 세 가지를 하지 않으려면 여자는 속전을 내지 않고 나가게 하라고 합니다. 어떤 빚을 졌더라도 그 빚을 갚지 않고 자유를 주게 합니다. 그러므로 남자와는 달리 여자를 종으로 샀으면 주인이 책임을 지라는 말입니다.

 

종이라도 상전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인에게 책임을 지우고 있습니다. 왜 이런 규례를 주신 것입니까? 율법은 죄를 알게 하십니다. 인간이 죄 아래 갇혔다는 것을 율법을 통하여 보여줍니다. 이런 율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이 종을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은 손해를 본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고대의 종이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여종을 사 왔다면 성적인 노리개로 여기다가 싫어지면 또다시 종으로 팔아버리면 그만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금요일 저녁에 티브이에서 김혜수씨가 진행하는 'W'를 보았습니다.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에 있는 한국 혼혈아는 30명 내외. 1984년 몬로비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의해 고속도로 등 갖가지 기반시설이 완공됐다. 이때 현지소녀와 한국인 사이에 사생아들이 하나 둘 태어난 것이다. 불과 1달러 정도의 돈에 20살도 되지 않은 소녀들이 한국인과 성관계를 가져야 했다. 아이를 가진 후에 한국인은 떠나갔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냉대뿐이었다. 그 혼혈 아이들은 이방인이 돼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이런 내용을 보다가 우리가 일제 강점기 때에 우리의 누이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일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공개되고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수백 번의 시위를 하는 것을 뉴스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아직 그런 일에 사과를 하지 않는 것은 박정희 정권 때에 배상을 받아버린 것입니다. 앞으로 다른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겠다고 하고서 돈을 받아 포항제철을 만든 것입니다. 그것으로 한국의 경제가 나아졌다고 하지만 그 배후에는 우리 형제들이 징용으로 끌려갔고 우리의 누이들이 일본군의 위안부로 팔렸던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은 이미 배상하였으니 더 이상 보상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는 포주들이 영업을 한 것이지 자기들이 강제로 끌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주장에 할 말이 없는 것은 이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그런 일에 앞장선 것입니다. 이화여대의 총장이며 한국 여성 1호박사인 김활란 이라는 자는 일본군대의 징용과 학병에 나가도록 연설하였습니다. 또 위안부에도 나가도록 독려하였다는 것을 제가 20대에 ‘말’이라는 계간지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나라의 백성들이 지금도 외국에 나가서 이런 짓들을 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금도 돈으로 여자를 사고 자기의 정욕을 채우고 버림으로 버림받은 여인들의 고통을 보자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러하거늘 지금으로부터 약 3천5백 년 전에는 어떠하였겠습니까? 여종을 사왔다가 상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방인에게 팔아버리면 그 여인의 신세는 참으로 비참한 신세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과 동족에게서 냉대를 받고 창기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잊지 말라고 하시면서 남자의 종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또 여자의 종에 대하여서는 함부로 내 보내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이 된 그들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종으로 삼았습니다. 그냥 종이 아니라 하나님은 남편이 되셔서 그들을 아내의 관계로 삼았습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삼았습니다. 그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여종을 사 와서는 아내로 또는 며느리고 삼으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불순종하는 모습을 예레미야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3:19-20절입니다. “19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이 귀한 땅을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20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너희가 확실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과 정 반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로 애굽의 노예이지만 하나님의 아내와 자식으로 사온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신실하신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아내가 남편을 속이듯이 속인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비록 언약을 어길지라도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심을 알기에 선지자들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호세아2:19-20절입니다.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 여인이 다시 바람이 나서 도망갑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주고 사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에게 진실함으로 장가들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어떠한지를 호세아를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한계를 보면서 새로운 시대, 새 언약의 시대를 내다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에 신실하지 못하나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심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게 하십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인줄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유대인들의 결혼과 이혼에 대한 생각들이 어떤지를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9:1-12절입니다. “봉독”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혼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창세기의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라고 하였으니 결혼하였다면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당장 질문이 나옵니다. 모세는 어찌하여 이혼증서를 주어서 버리라고 명하였느냐고 신명기 24장의 말씀으로 공격합니다. 이들은 율법의 전문가들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밉다고 이혼증서도 주지 않고 내어 쫓겨나면 그 여인은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그래서 그런 악함으로 오는 연약한 자의 보호 장치를 위하여 이혼증서라도 주게 한 것입니다. 재혼이라고 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의 규정을 율법을 잘 지킨다는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악용하는가 하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이혼 증서만 주어서 내어 보내는 것으로 자기 욕망대로 해석하고 적용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해석하시자 바리새인들은 그럴 바에야 아내에게 장가들지 않는 것이 낳겠다고 합니다.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간단하게 이혼증서 한 장 들려서 보내면 될 것인데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만 간음하지 않으면 이혼할 수 없다고 한다면 차라리 장가가지 않는 것이 낳겠다고 할 정도로 인간은 자기 욕망의 종입니다. 아무리 율법이 주어져도 인간은 그 율법을 통하여 스스로 죄인임을 발견하고 회개하는 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이나 결단과 결심과 행위로는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보내십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고 사랑하여 자기 백성들이 죄의 종으로 팔린 것을 보시고 자신의 피로 값을 주고 사 내십니다. 자기의 백성으로 자기의 자녀로 자가의 아내로 삼기 위하여 값을 주고 사십니다. 그러므로 여종을 사서 아내로 삼거나 며느리로 삼으면 그들을 책임지라는 이 말씀을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로마서 5:8-11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즉 죄의 종이 되어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그 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을 끝까지 완벽하게 자신의 신부로 만들어내시고야 마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에베소서 5:22-33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봉독” 이러한 주님의 능력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