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20:15 도둑질하지 말라 2010. 8. 15

 

도둑질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도둑질이란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는 것이 도둑질입니다. 오늘이 8월 15일 광복절입니다. 큰 도둑은 나라를 훔치는 것입니다. 일본이 정권이 바뀌어 총리가 눈물을 흘리며 100년 전에 한국을 강제 합병한 것을 사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극우세력들은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교과서에 싣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 나쁜 도둑놈들이라고 분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면 큰 도둑이나 작은 도둑이나 동일한 도둑입니다.

 

오늘날은 사회가 복잡하게 되면서 옛날에는 생각도 못한 도둑질이 있습니다. 지적 재산권입니다. 오늘 찬양대에서 찬양하는 악보가 복사하지 않고 찬양대 수만큼 책을 사서 찬양하였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도둑질 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교회 찬양대 중에 악보를 복사하지 않고 찬양곡마다 찬양대 수만큼 책을 사서 찬양하는 곳은 아마 한곳도 없을 것입니다. 혹 있다면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찬양한다고 하면서 도둑질한 악보로 찬양합니다. 도둑질 한 악보로 하나님 찬양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니 찬양 하고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도둑질하지 않아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나왔습니다. 종이란 자기의 소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여 금과 은을 받아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품삯이기도 하였으며 이런 것은 나중에 성막을 지을 때에 헌물로 드려지기도 하였습니다. 가축들은 어느 정도 소유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도둑질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품꾼입니다.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었다면 이제 가나안에서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레위기 25:55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애굽에 바로의 종이었을 때에는 제대로 품삯을 받지 못하는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서는 제대로 품삯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만 단지 품삯을 위한 품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품꾼입니다.

 

레위가 25장은 안식년과 희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6년 땅을 경작하였으면 7년째는 땅을 안식하게 하여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에서 이미 보았습니다만 땅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땅은 사거나 팔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레위기 25:23절입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여기서 거류민이란 소작인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소작인이 주인의 토지를 팔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경작권은 팔수가 있습니다. 경작권을 팔더라도 언제라도 무를 수가 있습니다. 본인이 무를 힘이 없으면 친척이 물러줄 수가 있습니다. 친척도 없으면 희년이 되면 원 주인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법을 주십니까? 신명기 9:5절입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들의 의로움으로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언약 때문입니다. 그러니 땅이 그들의 것이 아니라 소작인으로 하나님의 품꾼으로 살아야 하기에 땅을 영구히 사고팔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법들을 가나안에 들어가서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들 도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이사야 1:10-17절을 봅니다. “봉독”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돔과 고모라의 관원과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멸망 받은 이방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수한 제물을 바칩니다. 성전 마당만 밟고 갑니다. 이들이 무수한 제물을 바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도둑질 잘 하기 위하여 바칩니다. 이사야 1:23절을 봅니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예레미야 7:1-11절을 봅니다. “봉독” 예루살렘 성전으로 예배하러 오는 무리들에게 이곳은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하는 말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아니 분명히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고 제물도 드리는데 성전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사야의 고발과 같습니다만 9절을 봅니다. 도둑질 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성전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0절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서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고 합니다. 즉 도둑질 더 잘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니 11절에 보시면 성전이 도둑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현실이 아닙니까?

 

지난 주간에 CBMC 한국대회에 갔다가 왔습니다. CBMC는 connecting business & marketplace to christ 의 약자입니다. 비즈니스를 연결하여 사업의 현장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자는 것입니다. 주제 강사가 미국에 얼마나 범죄가 많고 위험한지 밤에 여자가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겨서 한 도시에서 이런 상황을 바꾸어보려고 운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교회마다 연합하여 기도회를 하고 집회를 하면서 거룩한 도시를 만들기 위하여 홍보과 캠페인과 엄청난 열정을 쏟아 부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십년을 하고 나서 평가를 해 보니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남에도 성시화 운동본부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도시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되었는지의 진단을 수많은 학자들의 논문들을 연구하여 말하는데 그것은 삶의 현장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고 장사를 하면서 이중장부를 만들고 세금을 떼어먹고 마땅히 지불해야 할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그런 불법들을 눈감아 달라고 뇌물을 주고 온갖 더러운 뒷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헌금을 하면 교회에서 축복받았다고 하고 축복을 해주는 것에 대하여 회개하고 변하여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였습니다. 약 4천명의 사업한다는 사람들이 모인자리입니다.

 

우리의 이런 현실이 이사야 선지자와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와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도둑질로 더럽혔습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는 간 곳이 없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대를 하였습니다. 이들을 돌보라고 하신 것은 너희가 애굽에서 그런 신세였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먹고 배부르게 되니 마치 자기들의 의로 그 땅을 차지 한 것처럼 여기면서 자기들의 소유를 늘리는 재미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약속의 땅에서 일어났기에 땅이 그 사람들을 토하여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70년간 종살이를 하고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하여 겨우 숨 돌릴 만한 틈이 생겼는데 벌써 포로로 잡혀가기 전의 죄악들이 또다시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는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는 형식적이나마 십일조와 헌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포로에서 돌아온 그들의 모습이 어떤지 말라기를 통하여 봅니다.

 

말라기 1:6-10절입니다. “봉독”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을 닫아버리면 좋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7-12절입니다. “봉독” 잘 아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합니다. 어떻게 돌아가느냐고 하니 도둑질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겠느냐고 합니다. 그것은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합니다. 아예 형식적으로 드리는 곳조차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도둑질이 일상적인 삶에서부터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성전에 이르기까지 온 땅이 도둑질에 물든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땅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율법을 지키자는 운동으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가복음 11:15-18절입니다. “봉독” 강도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마을 수련회에서 곽 집사님이 보는 작은 책을 보았습니다. 책 제목이 ‘성전과 경제’인데 유지미라는 사람이 지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의 경제구조를 연구한 내용입니다. 성전에 들어오는 수입이 얼마나 엄청난지 밝히고 있습니다. 성전이 엄청난 수입원인데 이런 곳을 둘러엎은 예수님을 가만히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장사의 수단을 사용하는 그들의 도둑심보를 드러내는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승천하시고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한 제자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합니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선포 앞에 너무나 분명하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돌로 치는 자들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4:32절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은 한 영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입니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성전을 삼아버립니다. 피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19절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과연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소유가 늘어나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고 소유가 줄어들면 저주로 여기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음에도 마치 소유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여기고 산다면 구약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갑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며 믿음에 떠나 부패하게 만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소유를 늘리려고만 합니다.

 

수련회에서 특별 간증을 하려고 나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올해 5월 달에 위암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수술하려고 개복하였다가 전신에 퍼졌다고 그냥 덮어버렸다고 합니다. 항암 치료를 하면 조금 생명 연장을 하는 정도이기에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암치료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남았느냐고 하니 길어야 2-3개월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53세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까지 잃은 것이 무엇이며 얻은 것이 무엇인지를 정리 해보고서 자기가 얻은 것 네 가지를 말하였습니다. 믿음, 가족, 신앙의 친구, 비전이라고 합니다. 10분을 채 서 있기도 힘이 들지만 아직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간증을 들으면서 우리가 다 빼앗기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차압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간증 자가 말한 믿음과 가족과 친구와 비전조차 다 주님께 빨려 들어갑니다. 서울 하나교회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십자가라는 무시무시한 중력장에 의하여 빨려들어 간다고 말입니다. 주님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사는 것이 도둑의 심보입니다. 이런 도둑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배후에 더 큰 도둑이 있어서 이렇게 됩니다.

 

마태복음 12:29절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도둑놈인 마귀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스스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마귀보다 더 강한 자로 오셔서 마귀를 십자가로 이기시고 자기 백성을 구하여 내십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인식시키시며 십자가라는 놀라운 중력장으로 끌어당기고 계십니다. 주님께 끌려들어가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며 생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