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요한계시록 22:6-9 내가 속히 오리니 2010. 5. 2

 

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 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오늘 말씀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속히 오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평소에 꿈, 소망, 희망, 비전이라고 하면서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과연 예수님 다시 오심과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바라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보이는 것은 가능하기에 사람들은 희망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소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서 추구하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시간에 긍정의 힘이라든가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같은 내용들이 들려도 아무른 거부감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원합니다. 지난 주 수요일 인용하려고 옮긴 글을 뺐는데 오늘 다시 말합니다. 바르트의 신학묵상입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이스라엘, 교회, 종교의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구원의 복음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들이 역사 속에서 가장 순수하게, 가장 강력하게, 자신의 본질에 가장 적합하게 출현할지라도 형편은 마찬가지입니다. -중략- 교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광범위하게 그리고 열렬하게 하나님의 것을 인간화하고 시간화하고 사물화하고 세속화하고 실용화하려고 시도하는 장소입니다.”

 

쉬운 표현으로 하자면 교회 와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정성 바쳐 복을 받자고 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바라는 복들이 인간적인 것이어야 하고, 시간 안에서 확인이 되어야 하고, 사물처럼 잡을 수 있어야 하고,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실용적이지 않으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실용정부라는 말도 하는데 실용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익을 위하여서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것이 실용입니다. 보이는 소망을 위한 것이라면 비실용적인 것은 다 도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한 사람이 해도 할 수 있는 일을 열사람이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미 요한계시록에서 보았습니다만 이 세상이 짐승의 제국입니다. 정치와 종교라는 짐승의 모습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와 종교에 소망을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희망은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 나은 선택을 여러분들이 투표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것들임을 말씀을 통하여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지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본문 6절을 봅니다. 또 계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고 합니다. 그 신실하고 참된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천사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어느 말씀이 생각이 납니까? 계시록 1: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셔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천사를 통하여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6절부터 요한계시록의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예수님이 속히 오실 것이니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 역시 1:3절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이런 것을 서론과 결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론의 내용을 결론에서 다시 말하는 것은 그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반드시 속히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믿으십니까? 그것도 속히 오실 것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한 2천년이 지나가니 사람들마다 어떤 마음이 있는가 하면 재림이 없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여기에 대하여 잘 증거 하였습니다. 베드로 후서 3:1-18절입니다. “봉독” 본문이 좀 길지만 다 읽어보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종말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은 재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조롱하면서 세상은 늘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늘이 옛적부터 있었으며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을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땅이 물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물로 심판을 당한다고 하여도 믿지 않고 조롱하다가 물로 심판을 당한 것이 노아 홍수의 심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도 세상은 이러하다고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며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면서도 주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의 넘침으로 다 멸망하고 살아남은 자는 노아의 가족 8명뿐이었습니다. 가정 수로는 단 한 가정이었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물로는 심판을 하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불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세상이 아직 이대로 있는가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8-9절을 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합니다. 천년을 하루같이 참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심으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누구입니까? 베드로서신을 받는 자들입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즉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우리 자신이 회개하도록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15절도 봅니다. 이렇게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는 것은 지금이 바로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기다리시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속히 오실 것입니다. 속히 오신다는 것은 이 역사전체를 마감하시는 것도 묵시로 보시면 하루 이틀도 걸리지 않는 속히 되는 일이지만 우리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바로 오늘이 우리의 종말이 되는 것입니다. 내일 일을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도 나중은 없습니다. 바로 지금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종 말씀을 드리지만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나를 믿지 않는 다는 것이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을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생명수를 마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은혜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요하거나 설득하여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일방적으로 선포할 뿐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목사 때 예수 전도단에서 훈련받으면서 길거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 모텔이 많은 곳으로 지나가면서 사람들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금 당장 회개하라!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모든 말씀입니다. 6절에서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선지자들에게 임하여 기록된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지켜야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경의 말씀을 다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누구를 증거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 사도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증거 하였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처음에 이런 전도를 하였을 때에 누구에게 한 전도입니까?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잘 섬기려고 노력한 사람인지 사람으로서는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할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의로서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참되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인간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이 행하는 의롭다는 일들이야 여기에 비하면 조족지혈입니다. 그런데 우리들끼리 모여서 무엇을 비교하며 경쟁하며 시기하고 자랑하는 것입니까? 목사가 설교를 해도, 거룩하게 대표기도를 하여도,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른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니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했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나는’이라는 것이 들어가는 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의의 배설물일 뿐입니다.

 

찬송가 274장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이 찬송을 작사한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는 모릅니다만 정말 이런 고백이 나오는 사람이 회개하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이런 자들에게 복이 무엇이겠습니까? 로마서 4:6-8절입니다.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주님 앞에 서는 날 무엇이 복이겠습니까? 그 죄가 가리어짐을 받고 사함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이 복이 없으면 주의 영광을 얼굴을 떠나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22:7절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할 때에 지킨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계시록 표현으로는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의 능력만을 끝까지 믿는 것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행함 주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왜 일어난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공로를 개입시킨 결과 거대한 교황의 권력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것에서 개혁한 것이 개신교인데 오늘날 개신교가 교황보다 더한 교권의 행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사라지고 인간의 행함으로 복을 받겠다는 종교인들로 인하여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영광을 사람들이 차지합니다.

 

본문 8-9절을 봅니다. 요한이 계시를 받고서 계시를 전한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를 하려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경배와 찬양은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께만 돌려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광을 받을 자리가 천국에는 없습니다. 인간의 영광이란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께 영광을 돌리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인 것입니다. 주를 섬김이 영광의 자리요 기쁨의 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 그것도 속히 오십니다. 이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영광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동안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희망들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교회를 다녀도 다른 교회보다 멋진 교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도, 학교도, 회사도 다 보암직하고 세상의 자랑거리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지난 달 구역 모임 에베소서 6장의 말씀에서 종이라도 상관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참된 소망이 있다면 종이라도 자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세상의 평가를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로마서 5:1-6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에 이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자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실 날에 완전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이런 것만이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는데 왜 환난이 오는 것입니까? 환난이 오는 이유는 소망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바라는 꿈이니 희망이나 소망이라는 것은 참된 소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통하여 참된 소망이 아닌 것들을 털어내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환난을 당하는 것이 그 순간에는 괴롭지만 성도에게는 환난을 통하여 인내가 나오고 인내를 통하여 연단이 됩니다. 연단이란 쇠가 풀무에서 불순물이 빠져나가듯이 헛된 욕망들이 빠져나가고 참된 소망이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하여 환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며 단단한 식물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환난조차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