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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에베소서 1:1-2 하나님의 뜻으로 2012. 3. 18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오늘 본문 처음 단어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단어가 친근하게 들립니까? 생소하게 들립니까? 우리의 평소의 삶의 상태에 따라 들리는 것이 다를 것입니다. 늘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사는 분도 계실 것이고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의 뜻만 좇아 사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늘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들이 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입에 발린 사람이지만 그 내용들은 성경에도 없는 자신들의 신비체험이나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꿈과 비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자신의 사도 된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하는 주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이라고 하는 그런 목사들의 권위의식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사욕을 챙기기 위하여 주의 종이라고 하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는커녕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다 드리기를 원하며 또한 그렇게 살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들마다 자신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뜻들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을 온전히 돌려세워서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살려지는 삶을 살게 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에서 과연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얼마나 말하며 살고 있습니까? 지난 한 주간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말이 많았습니까? 나의 뜻에 대한 말이 많았습니까? 비교해 볼 것도 없이 우리는 나의 뜻입니다. 우리의 모든 대화중에 주어가 무엇으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모든 주어가 ‘나’ 이지 않았습니까?

 

사람들마다 자기의 뜻들이 있기에 두 사람만 모여도 한 뜻이 되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게 본성으로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에게 정당한 말을 하여도 자식은 그것을 잔소리로 듣고 단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부모 된 우리가 공통으로 경험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우리도 어렸을 때에 부모임의 정당한 말씀들이 잔소리로 들렸다는 사실입니다. 자식들이 아버지의 말을 안 듣는 것은 자기들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얼마나 듣지 않는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1:2-3절입니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자식처럼 양육하셨지만 소와 나귀보다 못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는지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22:21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온 세상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육신이라고 합니다. 이 육신이 어떤 상태인지 로마서 8:7절에서 이렇게 증언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육신에 속하여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원수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라 하면여러분은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우리가 뭘 그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고 몰아붙이냐고 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주일날 교회당에 와서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는데 왜 그러냐고 할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야고보서 4:4절의 말씀을 드립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교회 다니면서도 세상과 벗되고자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이라고 열심히 하는 것도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길입니다. 한곳만 더 봅니다. 빌립보서 3:17-21절입니다. “봉독” 십자가의 원수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이 욕망입니다. 그래서 땅의 일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시민권이 하늘에 있어서 그리로 부터 구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이스라엘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로마서 10:2-3절입니다.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데 오히려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서 4:11-14절입니다. “봉독” 이것이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이 생각한 하나님의 뜻이란 예수는 이단의 괴수이기에 예수 믿는 사람을 다 잡아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며 달려갔습니다. 그 결과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으며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고 멸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서 복음을 전합니다. 도대체 이 사실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 때에 바울이 전도한다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이중간첩노릇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할 정도로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증거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중에 외식하는 많이 자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는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열심히 율법을 지킨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의롭다고 하는 수준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예를 들어 말씀합니다. 이들은 613가지의 율법 목록을 만들어서 생활 속에서 다 지킨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의 보다 더 나은 의가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그 의가 무엇인지 마태복음 21:31-32절을 봅니다.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가 와서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며 누가 너에게 이런 권위를 주었느냐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희에게 묻겠는데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말을 하는지 대답하겠다고 하시면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인지 사람으로부터인지 묻습니다. 그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하늘로부터라고 하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언 하였기에 어찌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알기에 백성이 무섭다고 하면서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지위유지를 위한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아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니 가겠다고 하고서는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지 싫다고 하고서는 그 후에 뉘우쳐 일하러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둘째 아들이라고 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걸림돌이 되었겠습니까?

 

지금 백성의 지도자라는 자들이 첫아들로 비유가 된 것입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한다고 말만 하고서는 자기들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세리와 창녀들은 이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리와 창녀가 되면 천국에 간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지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와 창녀들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결론을 예수님께서 다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1:33-40절입니다. “봉독” 자주 본 말씀이지만 오늘 처음 듣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자주 듣는 사람들이 더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안다고 하지만 이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과 같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처음 듣는 사람들이 이 포도원 비유가 바로 자신이 주인의 종들을 배척하고 죽이고 마지막으로 주인의 아들도 죽인 자임임을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들은 사람들이 바로 자기들을 공격하는 말씀인줄 알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하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있기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대로 물러날 자들이 아닙니다. 기득권 세력을 연합하여 로마의 권력까지 동원하여 결국은 이 비유의 말씀대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41-46절입니다. “봉독” 그들이 대답합니다. 그들을 진멸하고 제 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다른 사람들에게 세를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을 죽인 이 세상을 향하여 진멸하려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아들을 죽인 죄인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이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 뜻을 바울이 알았습니다. 결코 사람에게 나올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버지의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오늘도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은 결코 사람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만 되도록 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로마서 9:16절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왜 하나님께서 긍휼로만 구원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까? 로마서 11:32절입니다.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모든 사람이 불순종에 갇혔습니다. 그 모습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다 드러내셨습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인간이나 율법을 알지도 못하는 인간이나 간에 다 불순종에 갇힌 자들입니다. 왜 이렇게 가두어두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긍휼, 불쌍히 여김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느니 차라리 자살하고야 말겠다는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자임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원함이나 달음질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긍휼로만 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