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요한계시록 21:22-27 성전이신 어린 양 2010. 4. 18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오늘 본문은 21:3절의 상세한 묘사가 됩니다.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려면 무슨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죄인들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만나는 장소가 성막입니다. 성막만이 아니라 제사장과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9:38-45절을 봅니다. “봉독” 출애굽기의 상당한 분량이 성막(聖幕)의 제도와 제사장과 제물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는 회막(會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거룩한 텐트인데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곳이게 회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회막에서 매일 아침과 저녁에 일 년 된 어린양을 한 마리씩 제단에 드리게 합니다. 어린 양의 희생이 드려지는 곳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만나시고 말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목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본문 22절을 봅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성이라면 새 예루살렘 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은 성이란 건물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이 성도라면 그 안에 성전이라는 건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이 그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전이 되시는데 오늘날도 사람들은 성전을 짓는다고 야단입니다. 성전건축, 성전봉헌이라고 하면서 건물을 지으면서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당 건물은 성전도 아니고 제단도 아닙니다. 흔히 기도할 때에 주의 제단에 나아와서 기도한다고 그렇게 합니다. 성전이 아닌데 어떻게 제단이 있겠습니까? 자꾸만 그림자와 모형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배당을 성전이나 제단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성전 되심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9-14절입니다. 구약의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라고 합니다. 그림자요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 까지 맡겨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에 예수님의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막과 성전을 짓게 하신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영원한 성소를 보여주기 위한 그림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장막과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더럽혀지기에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림자로 보여준 것은 피 흘림으로 속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짐으로 하늘 성소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성소가 바로 하나님과 어린양이 되시는 것입니다.

 

다시 22절을 봅니다. 성 안에 성전을 보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 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와 히브리서만 보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서도 사람이 손으로 지은 곳에는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왕상8장). 이사야 선지자도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사66장). 그래서 예수님은 건물 성전을 헐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3일 만에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성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들은 건물 성전을 지키려고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도 성전이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증거 하다가 순교를 한 것입니다(행7장).

 

요한복음 14:16-20절을 봅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것이 하늘의 성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20-26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의 기도가 요한복음 17장입니다.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앞의 제자들만을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도록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아들이 주십니다.

 

출애굽의 목표가 하나님의 거처를 삼으시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거처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어린 양의 신부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영원히 함께 살 곳은 황금보석 꾸민 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그 안에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혜사 성령으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언약하시고 다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하늘 성소요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는 그림언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0:1-22절은 장차 예루살렘의 회복과 영광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1-3절, 11절, 19-20절을 봅니다. “봉독” 이사야가 미리 예언한 내용이 오늘 말씀에서 성취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26절을 봅니다.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께 경배하는 것이지요! 낮에 성문을 도무지 닫지 아니할 것이니 그곳에는 다시는 밤이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위협의 요소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출애굽이나 신약의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란 하나님과 어린양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들어오지 못하는 자들의 경계를 말하기 위하여 성을 말하고 성문을 말하고 성곽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건물로 말하는 것에 대하여 구역공부시간에 이미 보았을 것입니다. 한 번 더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11-22절입니다. “봉독” 이방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아무른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새 사람이 되어 약속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건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20절에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증거 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모퉁잇돌이 되시고 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 성전이 완성되면 예수님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물이 아니라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 다 찾아지면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그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 한 소망을 가진 자가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사셔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부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자꾸만 떼어내는 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시편 45:10-11절입니다. “10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11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잊어야 하고 신약의 성도는 세상을 잊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잊어버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애굽을 망하게 하시고 세상을 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하늘과 옛 땅을 사라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보아야할 말씀이 있습니다. 27절입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을 말하는 것도 구별을 위한 것입니다. 이런 분리가 일어나는 것이 사람들에게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리가 일어나지 않으면 천국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까? 속되고 가증한 일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악한 것도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사람도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본능입니다. 이미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이 세상에서 스스로 거짓말을 안 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대회를 하였는데 자기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람이 일등을 했더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이 정도로 거짓말은 우리의 보편적인 현실이며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본능입니다. 성경에서 거짓말에 대하여 어떻게 증거 합니까?

 

요한일서 1:5-10절을 봅니다. “봉독”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만약에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하신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악을 무엇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까? 7절에서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1서 2:22절을 봅니다.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한다고 믿는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안에서 서로 사랑이 안 되면 그것도 거짓말입니다.

 

요한1서 5:9-12절입니다.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거짓말하는 자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만이 나를 깨끗하게 하심을 믿는 사람이라면 서로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타향에서 고향사람을 만나면 반갑지요! 외국에서 한국 사람만 만나도 반갑습니다. 요즈음은 워낙 많이 나가서 그렇지도 않는 모양인데 정말 어렵고 힘 드는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을 살아갈 때에 같은 고향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우리는 같은 본향을 찾는 사람들이 맞습니까? 지금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로 만들어진 본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