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요한계시록 22:14-15 성에 들어갈 권세 2010. 5. 23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옛날에 나온 찬송가에 이런 찬송이 있었습니다. ‘누가 저 천국 문 들어갈까? 네냐 내냐?’ 발음이 잘 되지 않는 네냐 내냐 라는 그런 가사였는데 아주 심각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이런 내용에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교회만 다니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교회에서 조차 천국과 지옥보다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복을 받자는 이야기만 주로해서 그런지 관심사가 다른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는 것도 종말의 특징입니다. 종말의 특징이 두 편으로 나누어져서 고정되어 진다는 것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의롭고 거룩한 자는 계속하여 의롭고 거룩하게 되고 불의하고 더러운 자는 계속하여 불의하고 더럽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롭고 거룩한 자는 14절의 말씀이고 불의하고 더러운 자는 15절로 보면 되겠습니다.

 

먼저 14절을 봅니다. 자기 두루마리를 빠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 복이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복입니까? 이런 복을 받는 사람은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라고 합니다. 두루마기는 겉옷을 말하지만 성경 전체를 보면 예수님께서 입혀주신 의의 겉옷을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입는 옷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곧 거룩한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하여 구약부터 전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옷 이야기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함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옷이 필요 없었습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없었다는 것은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고 나니 부끄럽고 두려웠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하여 행한 일이 나뭇잎으로 가린 것입니다. 두려움을 피하기 위하여서는 나무그늘아래 숨었습니다. 그런 죄인을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가죽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가죽옷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짐승의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려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평생 부끄럽고 두려워서 자기를 가리는 일만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자기를 치장하고 포장하고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쌓여지는 것들이 결국은 자기의 의로 치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옷으로 비유하여도 됩니다. 자기 옷 자랑하는 것이지요! 세상적인 업적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그것은 나뭇잎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신을 가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59:5-8절을 봅니다. “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거룩하다는 백성들이 만들어낸 옷입니다. 이런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이사야61:1-3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의 영이 임하신 분,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신 분, 그래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분이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을 선포하시는데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시며 그 재를 대신하여 기쁨의 기름으로 하시고 그 슬픔을 대신하여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의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자들이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라고 합니다. 시온에서 왜 슬퍼하는 것입니까?

 

에스겔 9: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예루살렘에 일어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의 이마에 표시하여 심판을 면하게 하시는데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도 같은 뜻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찬송의 옷만이 아니라 이사야 61:10절에 보시면 구원의 옷, 의의 겉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 옷은 신랑신부가 단장한 것 같은 옷입니다.

 

구약에 예언된 이런 옷이 어떻게 성도에게 입혀지는 것입니까? 로마서 4:6-8절입니다.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이 바로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옷으로 가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의의 옷을 입지 않으면 어떤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까? 15절입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개들이란 모든 부정한 자들을 말합니다. 점술가란 수요일 저녁에 보았습니다만 길흉화복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그들의 영혼을 사냥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장래의 일을 숨겨두셨기에 미루어 짐작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게 하시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점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음행은 성적인 범죄만이 아니라 모든 우상숭배가 다 음행입니다. 우상숭배란 탐심을 따라 행하는 것이 우상숭배이기에 어느 인간도 음행을 하지 않는 인간이 없는 것입니다. 다 살인자들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함과 다름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하여 사실은 남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내 살기 위하여 거짓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이런 거짓말을 좋아할 뿐 아니라 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다 성 밖에 있을 자들입니다. 성 밖에는 슬피 울며 이를 갈 일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다 여기에 속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디도서 3:3-7절을 봅니다.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도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3절의 내용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셔서 구원을 하시는데 우리의 행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은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전에는 똑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 구원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오직 주의 긍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난 인간인데도 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나는 남보다 나은 점이 있어서 구원하였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도 전에는 똑 같은 죄인이라고 이렇게 분명하게 증거 하여도 사람들은 죄인들과 한 묶음에 들어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모습은 지금 어떤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일 경우에 나를 이렇게 구원하신 것은 이렇게 중요한 일을 시키려고 하였기에 나는 너보다 나은 자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의 모습이 다 무엇을 더럽히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중생의 씻음과 의롭다 하여 주심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제 계시록에서 옷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3:4절입니다. “봉독” 사데에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들이 몇 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옷을 입었는데도 그 옷을 더럽힌 자들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님의 속죄로 의롭다 하여 주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신자이지 실상은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자기 의와 자기 자랑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란 끝까지 그 옷을 더럽히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기는 자들은 흰 옷을 입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벌써 흰 옷을 입고 있는데 왜 다시 흰 옷을 입는 것입니까? 이 땅에서는 나의 행위로 주님의 의를 더럽히고 가릴 수가 있겠지만 주님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더럽힐 수조차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런 자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끝까지 더럽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희 옷의 능력이 영원한 것임을 말씀하시는 데 보좌 주변의 24장로들이 무슨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까? 흰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4:4). 이 옷이 영원한 것입니다.

 

3:18절입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나 만치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서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부유하게 되었다고 자랑하지만 실상은 벌거벗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행위로 부족함이 없다고 하여도 예수님의 주신 의의 옷이 아니면 벌거벗은 자라는 것입니다 .

 

7:13-14절입니다. “봉독” 14만4천의 수가 구원받은 완전한 수를 상징하기에 그 수는 사람이 능히 셀 수 없는 크고 허다한 무리입니다. 그래서 14만4천의 숫자 이후에 보니 능히 셀 수 없는 허다한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나오는데 그들의 찬양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 에게 있다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디도서 3:5절의 말씀처럼 자기의 의로운 행위에 있지 않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누구냐고 물으니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18:16-19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입혀 주시지 않아도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마포만 입은 것이 아니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거기다가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일시에 망하게 되는데 이들의 이름이 바로 음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영광들이 일식 간에 망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지만 또한 영적인 면에서 스스로의 의로움으로 치장하고 있는 것에 대한 멸망도 함께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자기들의 영광으로 치장한 것입니다.

 

19:7-8절입니다. “봉독”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그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아내가 무엇으로 준비한 것입니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옳은 행실인데 오직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입혀주신 것만이 성도의 옳은 행실로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것, 내가 스스로 나의 의지와 결단과 나의 행위로 마련 된 옷이 아닙니다. 그런 행위들은 성도의 옳은 행실로 인정하여 주시는 의의 세마포 옷을 더럽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결혼 예식에 나아가는 신부가 신랑에 마련하여준 의의 옷을 잘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루마리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은 인간은 은혜를 받고서도 그 은혜를 꼭 자기 공로인양 치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의 옷이 늘 더럽혀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남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이 어디에 나아가는 것입니까? 생명나무에 나아가고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