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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8-11 어찌하여 2011. 12. 25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본문 8절을 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때’와 ‘이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습니다. 이런 우상숭배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로마서 1장을 보시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모든 창조물에 분명히 나타나 있지만 범죄 한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인간들의 지혜가 기껏 신이라고 떠받드는 것들이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의 형상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이런 세상이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인지 로마서 1:18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세상의 썩어질 것을 신으로 섬기고 있으니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이 당연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대로 내버려 두시면 끝까지 우상만 쫓다가 함께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는 줄을 알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신이 그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4:4).

 

에베소서 2:1-8절을 봅니다. “봉독” ‘그때’와 ‘지금’을 아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 결과는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습니다. 곧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의 지배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때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길로 가면서도 전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서 더욱 나은 사람이 되기만을 위하여 달려갔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본질상 진노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자기의 행위로 구원받은 것인 양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과연 ‘그때’와 ‘지금’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교회로 다니고 있지만 과연 우리 안에 ‘그때’와 ‘지금’이 구별이 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여전히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면 과연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보내셨고 또한 성령까지 보내셨는데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때’와 ‘지금’이 분명히 다릅니다. 전에는 초등학문에 종노릇하였지만 이제는 참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알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대부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그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도 있으니 이런 말씀도 알고서 믿는다고 시인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아신바 된 것입니까? 아니면 학습된 지식입니까?

 

마태복음 7:15-27절을 봅니다. “봉독”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고 오지만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라고 합니다. 그들의 열매를 보면 그들을 안다고 합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이 어떤 것입니까?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누가 보아도 능력 있는 주의 종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런 자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하신답니다.

 

왜 이들을 주님께서 모르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 근거가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의 배후는 사단이 있습니다. 사단이 능력을 주어도 얼마든지 표적과 기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아들을 보고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자원으로 자신의 율법지킴과 자신의 신비체험과 자신의 영적인 지식들로 무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능력 있는 주의 종이나 된 것처럼 행사하는 이들이 바로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분이심을 믿지 않는 자가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신 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는 자들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누구인지 누가복음 7장에 보시면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합니다. 이 때 동네사람들이 다 아는 죄를 지은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기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이 마음으로 말합니다.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더러운 죄인일 줄 알았을 것이고 그러면 여자가 만지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에게 묻습니다. 500데나리온 빚진 자와 50데나리온 빚진 자가 둘 다 갚은 능력이 없어서 둘 다 탕감을 받았다면 누가 더 탕감해 준 자를 사랑하겠느냐고 묻습니다. 당연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죄인인 여인을 비교하면서 말씀합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의로 살아가는 사람이라서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 많은 여인은 많이 용서 받았기에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핵심 단어는 죄, 용서, 사랑입니다. 정말 죄를 알고 용서받은 사람은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도 관심이 없습니다. 사랑에 눈이 먼 것입니다.

 

다시 9절을 봅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책망합니다. 죄와 용서와 사랑을 알고 받은 자가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나타난 것을 무시하고 짓밟아 버리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0:28-29절입니다.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새 언약이 완성되고 나서는 모세의 법으로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이 심판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임을 믿지 않는 모든 율법주의 금욕주의 신비주의 영지주의 인본주의가 다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10절을 봅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종노릇 하는 모습이 할례만이 아니라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입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란 율법에서 지키라고 한 모든 날짜에 대한 것들입니다. 안식일, 월삭, 삼대절기 등을 지키는 것을 초등학문의 종노릇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그림자입니다. 이제는 실체가 왔기에 그림자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그림자를 붙들고 있는 것이 할례와 여러 가지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전 세계의 가톨릭과 개신교 거의 다 성탄절로 지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오늘을 성탄절로 지키라고 하였습니까? 초대교회 때 성탄절을 지켰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에도 없고 초대교회 때도 없는 성탄절을 왜 12월 25일로 지키는 것입니까? 기독교가 박해를 받다가 로마에서 공인을 하고 국교를 삼았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나라는 다 기독교로 개종시켜나갑니다. 속은 바뀌지 않았는데 껍데기라도 바꾸기 위하여 온갖 이방의 종교들을 적당하게 색칠만하여 기독교화 한 것입니다. 그런 일들 중의 하나가 로마시대당시의 가장 큰 축제의 날인 태양신을 섬기는 날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한 날로 정하여 함께 섞어버린 것입니다.

 

성경에서 지키라고 하지도 않았고 어떤 사도들도 지키라고 하지 않았던 성탄절을 지키면서 온갖 이교문화가 다 들어와 있습니다. 성탄 트리와 장식들이 다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이교풍습들입니다. 이런 가톨릭의 온갖 미신적인 것들을 타파하고 개혁한 것이 개신교입니다. 개신교는 오직 성경이 개혁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없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타협하여 수용하여 들어와 있는지 우리가 놀랄 정도로 많습니다. 성탄절만 아니라 여러분이 아는 교회의 절기들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송구영신, 여기다가 온갖 주일을 다 지키라고 합니다. 총회주일, 장애인주일, 총 전도주일, VIP초청주일, 각종 헌신예배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주일지킴이 있습니다.

 

저는 청년 때 교회에서 왜 이런 절기를 지키는지 의심을 해 보았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절기를 지키려면 다 지키지 왜 몇 가지만 선별하여 지키는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 모든 절기에는 한 주전부터 설교와 광고를 통하여 절기헌금에 대하여 강조를 합니다. 절기지킴이란 결국 다 돈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늘푸른교회 처음 와서 이런 절기들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부활절이라고 흰 소복을 입고 오신 분들이 어리둥절해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지키지 않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완성되었기에 좋은 것이라기보다는 헌금하지 않아도 되니 좋은 것으로 보입니다만 주님 앞에서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날과 달과 절기는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로마서 14:5-8절입니다.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모든 모임에 참여 할지 안할지의 결정을 누가 합니까? 자기 자신이 하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곳만 더 봅니다. 골로새서 2:13-23절입니다. “봉독”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제하여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절기와 초하루와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사 숭배,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는 이런 자들은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는 것입니다.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마십시오! 사람의 가르침과 명에서 돌이키십시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지와 결단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것은 몸을 괴롭게 하는 일에 지혜롭게 보이지만 그것 자체가 육이기에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데도 조금도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기억하고 전하여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1:23-26절입니다. “봉독” 주님 다시 오실 때 까지 주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전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 아닌 다른 모든 것에서 돌이키십시오! 새 언약 안에서 주어지는 하늘의 것들로만 채워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