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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12-20 복이 어디에 있느냐? 2012. 1. 1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2012년 첫 주일입니다. 사람들은 날과 시간에 의미를 둡니다. 그런데 과연 누구를 위하여 날과 시간에 의미를 두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로마서 14장의 말씀에서 어떤 날을 중히 여기든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교회들마다 송구영신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송구영신입니까? 물론 지난한해 믿음으로 살지 못함을 회개하고 새해에는 믿음으로 살겠다는 결심과 다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과연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본문 15절을 봅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도 하는데 과연 우리가 말하는 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이렇게 교회당으로 모인 우리들 안에도 그런 복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과연 성경에서 증거 하는 복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여러 가지를 복으로 말하고 있지만 모든 언약이 완성이 된 새 언약의 시대인 이 종말에 우리에게 지금 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12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고 합니다. 바울을 유대인입니다. 이방인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엄격한 바리새파의 교육을 받고 자랐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격한 율법으로 자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단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는 말은 복음을 위하여 유대인인 바울이 이방인과 같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9:19-23절입니다. "봉독" 지금 이 모습을 갈라디아 교회에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바울이 자유 하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복음을 전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한 것은 율법을 지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서선지자가 증거 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고 그 복음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이 가만히 들어와서는 예수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할례를 행하여야 하고 다른 율법의 조문을 지켜야 한다고 하기에 내가 너희와 같이 된 것처럼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 아무도 바울을 해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3-14절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할 때에 육체의 약함으로 전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육체가 약하여졌기에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였다기보다는 바울은 처음부터 육체의 약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육체의 약함이 어느 정도인지 사람들이 시험에 들 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여러 가지 질병으로 말합니다. 눈이라도 빼어주려고 하였다는 것을 가지고 안질이라고도 하고, 말이 어눌했다고 간질이라고도 하고, 말라리아로 인하여 얼굴이 일그러졌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에서 구체적인 병명은 없지만 바울 자신은 그것을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 하였습니다(고후 12:7).

 

이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 할 정도로 바울은 그 육체적인 고통이 극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거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받은 여러 계시가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런 가시를 두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바울이 자신의 야망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데 그런 가시를 제거하여 주시면 좋을 텐데 왜 그런 사탄의 사자라고 할 정도의 육체의 약함을 두셨는가 하는 것에 의문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외모도 멋있고, 학력도 좋고, 언변도 좋고, 신앙의 명문가에서 나오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율법에는 열심이었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보면 시험에 들 만한 육체적인 약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면 어떻게 저런 꼴을 하고서 복음을 전하는가 할 정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었고 더구나 바울을 마치 하나님의 천사를 영접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듯이 그들이 바울을 영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능력입니까? 복음 자체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너무나 외적인 것에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교회로 오는 사람들을 고객으로 보고 고객 감동을 넘어 고객을 졸도시키라고 합니다. 그런 곳에서 과연 세상에서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제대로 전하여 지겠습니까?

 

시험에 들 정도의 육체의 질병을 가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접한 그들이 거짓 선생들의 말을 듣고서 마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완전히 돌아선 것은 아니지만 흔들리고 있으니 이들을 향하여 바울이 언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복음을 들었느냐는 말입니다.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그렇게 바울을 영접한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역시 그들 속에도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이 훨씬 멋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오직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 보다는 무언가 나의 행위를 보탬으로 인하여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것입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만으로는 싫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아무 일한 것이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이루었다는 그 놀라운 복을 받아놓고서 지금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자들이 와서 바울의 복음이 잘못 된 것이고 인간의 행위가 가미 되어야 온전한 구원이며 복음이라는 말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처음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믿은 자들이 그 복음이 얼마나 좋았는지 할 수만 있었다면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신체 기관 중에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도 복음 때문에 주려고 한 것이 바로 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21절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자신이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곳에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제일 많이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것이 그 사람의 보물입니다. 이것을 복이라는 단어로 바꾸어봅시다. 우리가 제일 마음이 많이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것이 복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복이며 보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과연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마음이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정욕적인 것입니까? 후자라면 우리는 지옥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갈라디아서 1:6-10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의롭게 되는데 이 복음을 떠나 인간의 행위를 추가하려는 이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라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다른 복음을 좋아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사람을 좋게 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번영이나 성공을 말하는 것은 쉽게 드러나는 다른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말하는 수많은 교회의 사업들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별하기 쉬운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와 사람의 자존심이 챙겨지는 것, 즉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다른 복음입니다. 예수 믿고 멋있는 내 가정, 내 교회, 내 회사, 내 나라가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나쁘게 하는 요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기분 나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얼마나 못난 죄인인지 하나님이 죽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살해한 인간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인간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태어나면서부터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태어나서 자신이 하나님인줄 알고 태어난 인생이기에 나 외에 다른 신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분개하는 날 때부터 우상숭배자로 태어난 인간임을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갈라디아 교회도 처음에 이런 복음을 듣고 받아들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요 기적입니다. 더구나 바울의 육체적인 질병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험에 들 만한 것이었는데도 하나님의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처럼 영접한 것이 바로 갈라디아 교회의 복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잘하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하여 이들이 복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속히 다른 복음을 쫒아가는 이유는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여도 예수 믿고 나서 멋있는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이 또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바울이 처음에 복음을 전하여 믿었을 때는 눈이라도 빼어 줄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 교회의 복입니다. 복음을 듣고 기뻐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니 그쪽으로 마음이 쏠리면서 바울을 원수처럼 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바울이 전한 복음은 무언가 잘 못 되었어! 예수님을 믿고서 세상에서 잘 되어야 전도가 잘 되지! 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만 전하면 그것을 사람들이 좋아하겠어!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이 아주 열심을 냅니다. 그러자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이 솔깃하여 그들의 말을 듣고 따랐습니다.

 

본문 17-18절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라고 합니다. 너희를 이간시켜서 그들에게 열심을 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목사가 아주 열심인 사람들을 교인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런 열심을 가지고 목사를 따르게 하는 것이라면 엉터리입니다. 말이야 주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의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간질입니다. 이간질은 누구와 누구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것입니까? 바울과 이간 시켜 다른 복음 전하는 자를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이간질 시키는 것이기에 저주를 받으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1:2-3절입니다.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최초의 이간질이 에덴동산에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이간질시키기 위하여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처럼 지금 바울이 전한 복음을 비방하며 다른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따르게 하는 것이 이간질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편 가르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하여 사단의 종으로 삼는 이간질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19-20절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대하여 언성을 높이려 하는 것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다는 말입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한 마음인데 예수 그리스도로 향하지 않고 사람의 종이 되고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순종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합니다. 해산이라는 고통으로 복음을 전하였는데 다시 그 해산을 고통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이 정말 세상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복으로 여겨집니까? 참된 복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하여 크레다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 신자가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을 기대하며, 주님 안에서만 안식하며,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며, 주님의 의만을 신뢰하며, 주님으로만 자랑한다. 그의 마음과 사상과 소원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며, 그의 언행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결정되며, 그의 모든 기대와 소망이 주님을 근거하고 주님을 향하여 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것이 복입니다. 이 복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