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요한계시록 22:10-13 그대로 2010. 5. 16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지난주에 14절까지 보려고 하였습니다만 봉인이 열린 것에 대하여 이사야서의 말씀을 통하여 봉인의 의미를 살펴보느라고 10절만 보았습니다. 오늘은 봉인에 대하여 한곳을 더 보겠습니다. 다니엘서 12:1-10절입니다. “봉독” 다니엘 선지자가 끝 날에 대한 계시를 받습니다. 큰 환난 중에 구원받는 자는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깨어나서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봉함하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듣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느냐고 질문을 하니 마지막 때 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합니다. 7절과 10절을 보시면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고 모든 일이 끝나게 되는데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고 합니다. 성도의 권세가 깨어지고 연단을 받는 과정을 통하여 무엇이 드러나게 됩니까?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정결하게 되는 자와 계속 악한 자로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의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인이 열렸다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다니엘서를 보면 마지막 심판하여 이길 때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30-31절입니다.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봉인이 열렸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온 세상을 심판할 근거가 되십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 할 때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전합니다. 이런 선포는 유대인들의 근본을 뿌리 채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 예레미야 1:10절에 나옵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복음도 이런 방식으로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처럼 사도들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역사와 전통을 다 둘러엎은 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있었고 성전이 있었으며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르치는 랍비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유대회에서 출회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처형하여 죽여 버렸는데 그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은 얼마나 경악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들을 위협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 합니다. 그러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사도들에게서 표적과 기사도 나타났고 또 하루에 3천 명씩 5천 명씩 주께로 돌아오는 무리들이 늘어났습니다.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여 핍박이 일어나고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핍박을 받고 흩어져도 예수님의 말씀이 성취가 되기에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 까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끝에서는 무언가 맥이 빠지는 분위기로 마감됩니다.

 

사도행전 28:23-28절을 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증거 하였는데 오히려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자 가이사의 재판을 받으려고 호소를 하고 로마에서 연금된 상태에서 찾아오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도 어떤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까?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본대로 봉인이 되어 있어서 그렇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봉인이 열렸고 그 열려진 말씀을 증거 하는데도 역시 믿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비록 봉인된 말씀이 열려도 다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현상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 적용을 하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회개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자기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믿는 대로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대로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까지 믿어왔다는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11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이제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도록 내버려 두고, 더러운 자는 그냥 사람이 더러운 채로 내버려 두어라. 의로운 사람은 그대로 의를 행하게 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여라.” 봉인이 열렸는데도 사람들은 그대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여도 여전히 사람들은 믿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로 내 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것이 종말이요 심판인 것입니다. 2천 년 전부터 이렇게 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의로운 사람은 의를 행하게 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느낌이 듭니까? 편이 갈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중간은 없이 두 편으로 나누어지고 그것이 확정되고 고정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생명수가 필요 없다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이니 이방인이나 간에 세상의 종말이나 심판은 없다고 여기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란 날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하는 사람들입니까?

 

베드로후서 3:1-9절입니다. “봉독” 종말이 없다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이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에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다고 합니다. 멸망하는 사람들이 자세가 어떤 것입니까? 세상이 원래 있었던 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이 영원히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종말이 없다고 조롱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이 그대로 있다고 여기기에 모든 관심사가 눈에 보이는 세상에만 쏠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땅에 들어붙어서 사는 삶이 불의하지 아니한 삶이 없습니다. 더럽지 않는 삶이 없습니다. 구약의 정결 법에서 곤충이나 물속의 생물 중에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할 때에 땅에서 튀어 오르는 것과 물을 거스르고 갈 수 있는 비늘 있는 것은 정하다고 하며 먹게 하는데 땅에서 기어 다니는 것과 물에서도 바닥에 기어 다니는 것은 먹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것은 성도란 땅에 붙어있지 말고 세대를 거스르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영원히 그대로 있을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보이는 것은 잠간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임을 믿으십니까? 너희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오직 이 땅에 속한 것이 영원한 것처럼 살고 있다면 지금 그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돌이켜지지 않는다면 아직도 그대로 인 것입니다.

 

지난 주 집사님이 대표기도하시면서 이 말씀이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불의하고 더러운 자는 돌이키라는 말씀이 아니라 불의하고 더러운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내버려 두라는 것도 좀 의역입니다. 아예 불의하게 하라, 더럽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태가 이르기 전에 지금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도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미 보았습니다만 회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면서도 회개를 하지 않는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의로운 자는 의롭게 하고 거룩한 자는 거룩하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입니다.

 

여기에 순조하고 아니하고의 문제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하나님이 불의한 자를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불의하게 하시면 그 사람은 회개가 일어나지 않기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의롭게 하라는 말씀과 거룩하게 하라고 선포하시는 그 말씀의 혜택을 입은 자는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명령법이 명령만하고 순종의 주체는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친히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신실하게 이루어 가심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12절입니다. 11절이 종말의 말씀이기에 12절에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오시면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불의한 자와 더러운 자는 심판을 받고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는 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의 일하심이 성도에게 임한 것이 의롭고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으로는 의롭거나 거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의롭다 함과 거룩하게 함이 어떻게 선물인지 복도 안내판 제일 위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30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앞의 29절과 뒤의 31절에서 아무도 자랑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상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그런데 그 면류관을 보좌 앞에 돌려드리는 것은 생명을 주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상인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이 상이라는 것이 시시하게 여겨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했기에 더 많은 상을 천국에서 받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죠이 선교회에서 나온 ‘새 언약’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데이빗 윌커슨이라는 저자는 젊었을 때에 언약신학을 아주 방종한 교리로 여겼기에 곧 사라질 소수 종파의 교리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깨닫고 나니 새 언약은 죄와 의좋게 지내려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지만 자신의 죄를 미워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엄청난 소망과 능력을 약속하고 있다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합니다. 바로 해석이 나옵니다. 처음과 나중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는 말씀은 네 번에 걸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동일하게 두 번씩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작도 예수님이 하셨고 마무리도 예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권세는 예수님이 인자되심으로 인하여 주어진 권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도 처음(1:8, 1:17)과 나중(21:6,22:13)을 알파와 오메가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아온 그대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늘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별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인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분의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4-17절입니다. “봉독”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습니다. 이제는 자기를 위하여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태어난 그대로 있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