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1~4 남을 낫게 여기고 2018. 2. 25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지난주에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복음에 합당한 시민 노릇하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었다면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비록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라도 우리의 영원한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에 삶의 방향과 목적이 달라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한 마음으로 서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은 멸망의 증거가 되는 것이며 복음으로 핍박을 받는 자들은 구원의 증거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은혜 이듯이,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것도 은혜로 주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은혜라고 하면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만 성경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은혜를 받은 아벨은 가인에 의하여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다른 사람들의 삼분의 일을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데려가 버렸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계속되는 믿음의 사람들의 내용을 보면 조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힘, 돌로 침을 당함, 톱으로 켜임, 시험 당함, 칼로 죽임 당함, 양과 염소의 가죽 옷을 입고 떠돌아다님, 궁핍, 환난, 학대받음,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들은 이름도 나오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스스로 이 길로 가겠습니까? 모두가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 이런 길로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 고난의 길을 간 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다 이 길로 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봉독 전체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의 말씀과 연결되기에 접속사 그러므로로 연결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과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의 말씀이 대외적인 문제를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지를 말한 것이라면 오늘 말씀은 교회 내부의 이야기를 합니다. 우선 1절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이라고 합니다. 우리 문장으로 보면 빌립보 교회 안에 이런 것이 있다면 이라는 가정법처럼 보이지만 지금까지의 말씀을 보면 이런 것이 이미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복음을 듣고 믿었기에 빌립보 교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복음의 선포와 믿는 일이 일어난 것을 사도행전으로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 안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권면, 사랑의 어떤 위로, 성령의 어떤 교제, 긍휼, 자비가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내분이 있었습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다툼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인도로 복음이 선포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납니다. 인본주의자들은 이런 말씀을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일은 자신의 인본주의적인 가치판단이 무너져 내려야만 받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죄악 중에 잉태한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죄악 중에 잉태 되었다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을 때에 우리도 그 허리에 속하여 함께 따 먹은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고 하면 내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는 증세가 나옵니다. 선악의 판단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선악의 판단을 하고 살아갑니다. 언제나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가족이 하나 되지 못함도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정당도,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진리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있다는 것을 진리를 여기고 사는 인생들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를 정당화 해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진리로 여기는 것이 자기중심의 선악체계를 가지고 있는 타락한 인생의 실상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살과 뼈, 세포 하나하나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복음을 듣고 믿게 되면 너무나 이질적인 요소가 우리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 안에는 두 싸움이 일어납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다투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이런 갈등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이 세상 풍속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성령이 임하여 다른 욕구가 우리 안에 일어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 자비가 나타나고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는 일들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툼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한 성령이 임하여 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데도 육체의 소욕이 있기에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에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바울도 심히 다툰 적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5:36~41절입니다.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사도행전 15장에서 사도들이 모여서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회의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그동안 복음을 전한 곳에 다시 가서 형제들을 방문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니 바울이 중도에 포기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자 서로 심히 다투었다고 합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추천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안디옥에서 파송을 받아 여러 곳에 복음을 전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서로 심히 다투었다고 하는 모습을 보면 같은 영이 임하여 같은 주를 믿어도 이런 다툼을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이러함에도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나바와 마가가 따로 가고 바울과 실라가 따로 감으로 복음은 더욱 진전이 됩니다.

 

우리가 빌립보서 1장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만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니 바울을 사랑해서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을 시기하여 자기들의 옳음을 나타내려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자도 나왔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함으로 바울을 괴롭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하나 저렇게 전하나 다른 복음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으로 인하여 바울은 기뻐한다고 합니다. 바울도 이런 고백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연단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도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그런 고난이 가중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3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아무 일이라도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흔히 교회 일을 한다면서 선한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교인들끼리 경쟁을 시킵니다. 그래서 전도와 기도와 헌금과 여러 가지 봉사하는 것을 시각화 하여 그래프를 그리고 표를 만들어 독려합니다. 그런데 교회란 일체의 경쟁이 없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이 무슨 경쟁을 하는 것입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면 운동장에 달리기 하는 자가 상 받기를 위하여 달려가라는 말씀은 무엇이냐고 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그것은 달리는 방향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생명도 아닌 것과 썩어질 것을 구하거나 남들보다 더 큰 상을 노리고 달려간다면 그것은 다툼과 허영이 아닙니까? 내가 열심히 노력하여 하늘나라에서 남보다 낫게 되려고 하신다면 성경을 잘못 본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기쁨을 위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의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하면서 개인적인 공적을 쌓음으로 개인적인 상이 많다고 하면 자기 일만 열심히 할 것입니다. 남의 일을 돌아볼 틈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가치가 교회에서는 통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하루에 한 시간 일한 사람의 품삯이 같은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와 긍휼의 나라인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개인적 성과주의로 변한 곳으로 보입니다. 교회가 세상이 되어버린 것을 세속화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몸은 하나의 몸입니다. 성령도 한 분입니다. 소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입니다. 믿음도 하나입니다. 세례도 하나입니다. 하나님도 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교회는 하나뿐입니다. 교회가 하나뿐이라고 하니 신학자들이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을 합니다. 보이는 교회는 이렇게 지상의 교회들이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성령을 받았다면 한 몸이며 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들끼리 경쟁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경쟁합니다. 바울의 복음을 들은 빌립보 교회 안에서도 서로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겸손하라고 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도덕적인 훈련이나 율법적인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시작합니다. 전체 문장이 한 문장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하는 이 모든 내용도 다 그리스도 안에서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몸의 지체라면 서로 다툼과 시비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빌립보교회나 오늘날 교회 안에 다툼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옛 사람이 있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한 몸으로 유지되는 것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야 한다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2:5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다음 주에 보겠습니다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 되시지만 그 동등 됨을 버리시고 자기를 비워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자들이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직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충만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신다는 것은 말씀이 충만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영이기에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충만하여 그 말씀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보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자기의 죄를 알게 됩니다. 자기의 죄를 안 자는 가면 갈수록 자신의 죄가 어떠한지 더 깊이 드러나게 됩니다. 전에는 죄로 여기지도 않은 것이 더욱 크게 부각이 됩니다. 자신의 존재자체가 얼마나 죄로 가득한지 알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8~10절입니다.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바울사도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한 자며 사도 중이 가작 작은 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는 어떤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지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1:15~17절입니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자인지를 제대로 알게 됩니다. 만삭 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로 고백한 바울이 이제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런 주님 앞에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나보다 더한 죄인의 괴수가 없다고 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라면 당연히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천국을 맛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