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10~13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2018. 7. 1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오늘 읽은 본문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대부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들어온 말씀입니다. 가정이나 가게나 회사에 이 구절이 새겨진 나무액자를 걸어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능력을 주시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한때 유행한 적극적 사고방식과 같은 내용으로 알려졌습니다.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대식 용어와도 통하는 말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앞에 나오는 자족을 배웠다는 말씀과는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은 주입식 교육입니다.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학생들을 받아 적고 외워서 답을 써야 했습니다. 그런 교육자체도 신성한 것으로 여겨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학교의 교육보다 더 신성하고 절대적인 가르침으로 인식되는 곳이 종교입니다. 종교(宗敎)라는 말 자체가 가장 근본적이며 크고 높은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교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을 때는 종교 전문가가 가르치는 것이 신의 가르침일 것이라고 인정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수많은 이단에 빠진 자들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성경이 정말 그러한가를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가르쳐주는 대로만 세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 말씀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헛된 욕망에 빠지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요즈음 말로 희망고문을 시킨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욕망들이 있습니다. 그런 욕망을 이루는 구절로 이런 말씀을 차용하여 쓴 것입니다. 6월 구역 모임에 나눈 내용인데 거짓 선생들이 어떻게 합니까? 탐심으로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를 이득으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벧후2:3). 그런데 그런 거짓 선생들의 말에 넘어가는 이유는 그 사람의 마음에도 탐심이 있었기 때문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봅시다.

 

분문 10절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합니다. 기뻐한 이유는 이미 앞에서도 말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연보를 보내어 함께 참여한 것으로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1:5,6). 그런데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그 일을 언급하면서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생각하던 것이 다시 싹이 났다고 합니다. 바울을 위하여 연보하려고 생각은 하였지만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에바브로를 통하여 연보를 보냈기에 기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지 돈을 받았기에 기뻐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에 참여한 것으로 기뻐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 사역을 하면서 그들에게서 연보를 받지 않았습니다. 자기 손으로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이유는 헬라 문화권속에 있는 도시들은 여러 철학 선생이라는 자들이 연설을 하고 돈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에 방해가 될까하여 고린도지역에서는 가난한 교회를 위하여 연보하게는 하였지만 자기를 위하여서는 받지를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사는 것이 주님의 명이시지만 바울은 그런 권리를 쓰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빌립보 교회의 연보를 받고 기뻐하는 것은 그 정도로 빌립보 교회와는 깊은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서 보낸 연보를 몇 번이나 받았습니다. 복음의 시초부터 지금까지 복음에 참여하여 연보를 보낸 교회는 빌립보 교회뿐이라고 합니다(4:15~18). 그런데 연보를 보내서 기쁘다고 해서 내가 궁핍하여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신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합니다. 바울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합니다. 비천하다고 비굴해 지지도 않았고 부요하다고 자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은 바로 앞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거저 13절의 말씀만 외우다시피 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님이라는 복음성가도 나왔습니다. 그 가사 중에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런 노래를 반복적으로 부르고 합심하여 기도하고 그런 설교를 들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형편도 안 되면서 믿음으로 한다고 하면서 예배당 짓다가 부도난 곳이 한 두 곳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을 때에 정말 말씀이 그러한가 하고 성경을 상고해 보셔야합니다. 성경의 본문을 읽어놓고 그 본문의 앞뒤와 같은 맥락인지 보셔야 합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르게 증거 되는지 아니면 목사의 야망을 성경에 빗대어 설교를 하는지 분별하셔야 합니다. 제가 만민중앙교회에서 나온 사람 몇 분과 연락이 되어 도대체 어떤 곳인지 설교 몇 편을 들어보았습니다. 천국을 차등화 하는 것과 더 높은 곳에 앉기 위한 헌신과 열심을 독력하면서 오식 당회장의 어록만이 절대화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당회장 목사의 설교를 듣고서 성경이 과연 그러한지를 묻는다면 그런 사람은 사탄의 미혹에 빠진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11~12절입니다. 연보를 보냈다고 기뻐하는 것보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에 참여한 것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주에 다시 나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자족을 배웠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보려고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고난은 너무나 엄청납니다. 그런데 그런 고난 중에서 배운 것은 자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능력 안에서 가능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족을 스스로 배우면 문화나 철학이 됩니다. 자족이라는 말을 영어로 하면 self-sufficiency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족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족이라는 것이 내게 주시는 능력 안에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이지만 전혀 다릅니다.

 

먼저 우리의 문화 속에서 말하는 자족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안빈자족(安貧自足)이나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있습니다. 도교의 사상인데 가난한 가운데서도 평안하고 자족하면서 도를 즐긴다는 말입니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즐거움이 그 안에 있고 의롭지 않게 부귀를 누림은 나에게는 뜬 구름과 같다논어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동양의 문화 속에서도 이런 자족에 대한 내용들은 많이 나옵니다. 이러한 자족들은 자기 스스로 배운 자족입니다. 이런 자족에는 전적인 죄인에게 전적인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복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17:18절에 보면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바울과 쟁론을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이런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아타락시스 에피테이아 이런 말들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철학자들은 인간의 최고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든지, 정신적인 쾌락을 말하든지, 육체적인 쾌락을 말하든지 결국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바울은 복음을 지식과 논리로 전하려고 하였지만 별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로 내려오면서 거리끼고 미련한 십자가만 전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통하여 자족이 무엇인지를 배운 것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참된 자족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곧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고린도후서 12:7~10절입니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1)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사도가 받은 계시가 너무 큽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하여 자만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육체에 하나님께서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합니다. 전에 성경은 사탄의 가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심각한 질병입니다. 어떤 것인지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시험에 들 만한 것입니다. 그런 육체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말씀을 봅니다.

 

갈라디아서 4:13~14절입니다.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육체의 약함이란 어떻게 주님의 계시를 받은 자가 저 모양이냐고 할 그런 가시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업신여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의 천사와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을 했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상식을 뛰어 넘는 십자가 복음의 능력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무엇을 배웠다는 것입니까? 자족함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의 약함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웠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께 배운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을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크게 기뻐하면서 자신의 약함에 대하여 자랑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한다고 합니다.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자족을 배운 삶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자족하십니까? 자족이 아니라 불만만 가득합니까? 대부분 후자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자족을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동양적인 도교 사상의 자족이나 서양철학의 자족을 배워보기는 하였지만 그런 것으로 우리 안에 참된 만족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나타난 참된 자족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가 없는 자족입니다. 바울사도도 자신의 고통을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그 말씀을 통하여 자족이 무엇인지 배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능력이 머문다는 말의 각주를 보면 장막으로 덮는다는 말입니다. 아예 약함으로 그 인생전체를 덮어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심이 성도에게 임함으로 일어납니다.

 

디모데전서 6:3~5절입니다.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1)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바른 복음을 따르지 않으면 교만하여 변론과 언쟁을 좋아합니다.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납니다. 우리에게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면 바른 복음을 받지 않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거룩한 말을 하고 하늘의 복을 이야기하여도 그런 것들을 차지하기 위하여 투기하고 경쟁하게 한다면 이것은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결코 자족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더 높은 곳을 차지하기 위한 투기만 있을 뿐입니다.

 

6~10절을 봅니다.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이런 말씀에 아멘이 되십니까? 안 되신다면 될 때 까지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우리를 다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래 살아남아 있는 것이 결코 복이 아닙니다. 얼마나 우리의 자아들이 깨어질 것이 많은지 아직 이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아와 자존심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대적하여 높아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무너지고 깨어져서 정말 내가 죄 덩어리임을 알고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함을 아는 자라면 지금 자족하는 정도가 아니라 과분한 삶임을 알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능력입니다.

 

11~16절입니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이 말씀을 우리가 믿으십니까? 주님은 이 말씀대로 이루실 것을 믿으십니까?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명한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주님께서 이루어내십니다. 그러므로 기약(期約)이 이르면, ()자는 약속에 따라 만난다는 말이 기자이고 약()이란 묶어서 약속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에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입니다. 이 본문을 예수님과 하나님을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온 우주 만물에 나타내실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17~21절입니다.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20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21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말씀을 읽어도 그냥 글자만 읽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런 말씀이 실재가 되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추구하면서 살아온 인생들이 전복(顚覆)이 일어납니다. 가치관의 전도(顚倒)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에 부한 자들에게 명합니다. 우리도 다 부한 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증거입니다. 생명에서 끊어졌기에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물을 저축하려고 하지만 그 웅덩이가 터진 웅덩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기에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자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마음을 높이지 않아도 됩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둡니다. 이런 자들은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기에 이런 내용들을 자기 백성들에게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버리고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으로 반론을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내용이 무엇인지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자족하며 사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원한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선물보따리를 원한 것이라면 아직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족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고 김종필씨가 묘비명을 자기가 섰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인생 90을 살아보니 89년이 헛됨을 알았다그런데 복음은 듣고 믿는 자는 90년을 살아보지 않은 젊은이도 인생이 헛됨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는 이 하늘과 땅이 다 사라져도 영원히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자족할 정도가 아니라 과분한 선물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족함을 배웠다고 합니다. 우리가 같은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면 우리도 이 길로 이끌려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남은 생이 예수 그리스도로 안에서 자족을 배워감으로 예수님 외에는 더 원할 것이 없다는 고백이 나오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