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6:1~8 그가 살아나셨다! 2020. 4. 26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1)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지난주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용감하게 말한 사람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이 사람은 공회원이며 백성의 존경을 받는 부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유대인들이 두려워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드러내면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그런데도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한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그 죽음의 능력입니다. 그뿐 아니라 구약을 완성하시고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는 일도 십자가로 이루어내심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입니다. 안식일이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때가 금요일 오후입니다. 금요일 오후에 급하게 장사가 진행되었기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무덤만 확인한 후에 향유를 준비하여 두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난 이른 아침 해 돋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 야곱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무덤으로 가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줄까 하면서 갑니다. 무덤의 돌문을 열어야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덤에 가까이 가보니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고 합니다.

 

5~7절입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예수님의 시체를 두었던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랍니다. 흰 옷을 입은 청년으로 등장한 자는 천사입니다. 이 천사의 말을 들어봅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를 무덤에서 찾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함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여인들이 빈 무덤을 확인하고 천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뻐하기는커녕 몹시 놀라서 떱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두려워하였을까요?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여인들도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예수님 가까이에서 따라 다니며 섬기는 여인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도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 때에 모든 자의 부활을 믿지만 메시아의 죽음이나 메시아의 단독적인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세 가지 내용을 보겠습니다. 첫째는 본문 2절의 안식 후 첫 날입니다. 각주를 보면 헬라어로 그 주간의 첫 날로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첫날이 오늘날 일요일입니다. 이 날에 부활하셨기에 초대교회 때에 이 날에 모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안식일에도 모였고 부활 후 첫날에도 모였고 심지어 날마다 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차츰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증거 되면서 안식 후 첫날 곧 그 주간의 첫날에 모이는 일이 성경 몇 곳에 나타납니다. 이제 안식일에 모임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지만 아직 율법에서 자유하지 못한 자들은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고 이방인의 모임을 비방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답변을 합니다.

 

골로새서 2:16~17절입니다.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구약의 날과 달과 절기와 안식일과 제사와 성전과 율법들이 다 그림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신 후에 왜 또 다시 날과 달과 절기와 안식일 같은 그림자에 묶이느냐는 책망입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율법의 조문까지 지우고 제거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십자로 승리하셨습니다(2:8~15).

 

그러므로 안식 후 첫날이라는 말은 이제 구약이 완성되고 참된 안식이 주어지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였습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안식 안에 살아감이 참된 삶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식 안에 살아감은 거룩한 시간과 거룩한 공간 안에서 사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참된 안식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참된 평화와 안식이 없는 이유는 인간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은 율법을 주셔서 거룩한 공간과 시간을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공간은 성전이며 거룩한 시간은 안식일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주어진 거룩한 공간과 거룩한 시간을 지키지 못하기에 참된 안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도 안식일도 그림자입니다.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집니다. 그러므로 공간의 거룩함이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자가 되기에 성령이 임한 자가 성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시간의 거룩함인 안식일도 완성하였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어떤 시간도 거룩한 시간입니다.

 

둘째는 5~7절의 천사의 말입니다. 봉독무덤 문이 열려있고 무덤 안에 천사가 한 흰옷 입은 청년의 모습으로 있으니 놀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천사가 하는 말이 놀라지 말라고 하면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무덤에서 찾는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는 그가 살아나셨기에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를 두었던 곳을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천사가 예수님께서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그 말씀을 다시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곳에서 예수님을 뵐 것이라고 전하게 합니다.

 

마가복음 14:28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예수님께서 십자가지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는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텐데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갈릴리로 가십니까? 예수님은 처음 제자들을 부르신 곳이 갈릴리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기 위하여 올라가시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면 한 자리하려고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시고서는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영광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가셔서 제자들을 새롭게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세 번째로 본몬 8절입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부활의 소식을 듣고 기뻐함이 아니라 두려워 도망가고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합니다. 왜 이럴까요? 유대인들은 부활을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었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모세 오경만 성경으로 받아들이기에 모세 오경 안에서는 부활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세오경으로 부활을 증언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12:27).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백성들은 죽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살아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바리새파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믿은 부활은 마지막 날에 부활을 믿었습니다. 물론 구약의 사람들은 마지막 날이 메시아 오시는 날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죽음 사건에서도 마지막 날 다시 살아날 것을 마르다도 마리아도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그들 앞에서 다시 살아날 것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이며 생명임을 말씀하시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지만 십자가에 죽어버린 예수님이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도 너무 두려워 어찌 할 바를 모릅니다.

 

다음 주에 볼 9절을 봅니다. “2)[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9절 앞에 괄호가 있고 각주가 있습니다. 각주를 보면 어떤 사본에는 9~20절까지가 없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사본에는 오늘 본문이 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증거가 되었겠습니까? 지금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이 두려워서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실패와 연약을 배경으로 복음이 증거 됩니다. 마가복음에서 이러한 패턴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박윤만씨의 마가복음의 일부분을 인용합니다.

 

[‘사람들의 실패라는 주제가 마가복음을 이끌고 있는 주요 주제라는 것은, 부활 담화에서만이 아니라 전 내러티브에 골고루 퍼져 있는 소위 말하는 메시아 비밀 담화에서도 나타난다(1:25,34,43~44; 3:12; 5:43; 7:36; 8:26; 9:9)....... 인간의 실패로 끝나는 종결이 의미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실패 가운데서 실행되는 역설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 왔다.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는 자가 불로 세례를 주는 자라고 예언했지만, 오신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셨다(1:8~9). 네 종류의 땅 비유(4:1~9, 13~20)에서 말씀에 비유된(13) 씨는 세 번의 연속적 실패 이후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져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거둔다(8,20). 스스로 자라나는 씨 비유(4:26~24)에서 농부가 밤낮 자고 일어나는 것 외에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땅이 저절로”(28) 씨의 열매를 맺는다. 치료가 약속된(5:22~24) 야이로의 딸은 혈루증 여인의 개입으로 치료는커녕 결국 죽게 되었지만, 예수님의 늦은 도착은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소생의 기적을 체험하는 계기가 된다(41~43).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12:1~12)에서 아들의 죽음은 성전의 머릿돌이 놓이는 계기가 된다(10). 제자들은 후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붙잡히게 될 것이지만 그 매임이 도리어 매시아의 증인노릇하는 기회가 될 것이고(10:9), 그 결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 말해진다(10). 마찬가지로, 배신당한 인자는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기보다 그럼에도 성경에 기록된 그의 길(14:21)을 걸을 것이고, 제자들의 도망은 하나님께서 목자를 치신 까닭에 일어난 양들의 흩어짐(27)으로 해석되어 비극적 상황에서 이뤄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을 보게 한다. 무엇보다, 죽어 들어간 무덤이 역으로 새 생명이 잉태되는 모태(16:6)가 될 수 있음을 예수님은 그의 부활로 보여 주셨다. 이 모든 것들은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의 무능과 실패 앞에 무너지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실현되는 역설적인 나라라는 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여인의 두려움과 침묵으로 끝나는 마가의 종결이 비록 현대 문학의 결론을 기대한 이들에게는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마가의 신학적 주제를 잘 따라온 이들이라면 그 두려움과 침묵이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또 다른 계기가 될 것이라는 해석을 쉽게 할 수 있다.]

 

상당히 긴 내용을 인용한 이유는 마가복음 전체의 줄거리이기도 하지만 제가 종종 인용하였던 아브라함 요수아 헤쉘의 사람은 망치고 하나님은 이루시고의 내용과 같아서 인용하였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자들이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하는 자들인데 이들이 어떻게 부활을 증인들이 되겠습니까? 더구나 여자의 말은 증거의 능력이 없는 시대에 여자들이 부활의 최초 목격자가 되게 하시는 일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믿을 자만 믿게 하시는 예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에게 보란 듯이 나타내시지 않고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예수님께서 나타내시려고 하는 자들에게만 부활을 보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능력의 모습을 예루살렘에서 드러내시면 다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비록 배신하고 떠났다고 할지라도 다시 열심히 모여들어서 나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이제 너희들 다 죽었다며 완장차고 설치고 다닐 자들입니다. 오늘날도 부활절의 메시지들이 거의 다 이런 식의 부활의 능력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분이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내가 좋아하는 말을 사람들의 설교를 통하여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보다 과연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설교 본문의 맥락이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계시면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싶은 자들에게만 나타내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러자 어떤 모습으로 복음이 증거 됩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에 약 120명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큰일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러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하루에 삼천 명, 오천 명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도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능력 있게 전도하자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곧 이어 스데반 집사의 순교가 일어나고 야고보의 순교가 일어납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인하여 교회에 핍박이 일어나자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흩어집니다. 그러나 그 핍박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1:8).

 

사도행전 28:23~31절입니다.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29 3)(없음)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마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의 끝이 이렇습니다. 무언가 흐지부지해 보입니다. 대단한 능력으로 시작하였는데 잡혀서 감옥에 가고 순교하고 그렇게 죽어갑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 29장을 자기들이 쓰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끝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다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만 믿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하는 자들에게 대단한 능력이 나타나면 믿는 자가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표적과 기적이 아니라 핍박과 고난과 갇힘과 순교로 끝이 납니다.

 

이 복음이 2천년을 지나 우리가 듣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은 사람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무력함과 실패와 연약함을 배경으로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이루어내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과 실패도 한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어디서 찾으시겠습니까? 그는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거리끼고 미련한 소식이기에 전하여지는 방식도 그러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까지 십자가의 방식으로 일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