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5~11 이 마음을 품으라 2018. 3. 4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은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독론의 핵심이 다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합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신 정도가 아니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그 복종이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피조물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그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엄청난 내용이 어떤 문맥에서 나옵니까?

 

빌립보서 1:27~30절을 봅니다. 봉독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시민노릇을 하라는 것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것이 멸망의 증거이며 복음으로 핍박받는 것이 구원의 증거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를 주신 것은 믿음만이 아니라 고난도 은혜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본 2:1~4절을 봅니다. 그리스도도 안에서 서로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한 믿음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툼이 있었기에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 일만 돌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것이 바울이 말한 로마시대나 이 시대나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봅니다. 로마시대에 스스로 겸손해야 되는 자는 노예들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낮추기 보다는 승리와 당당함이 로마 세계의 도덕적 가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로마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날 이 땅의 현실을 어떻습니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면 다른 사람이 나를 짓밟는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내가 남보다 강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린이 태권도 도장의 버스에 강해야 산다고 하는 글을 붙여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가르치시겠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나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왜 교회로 나와서 예수님을 믿습니까? 낮아지지 위해서입니까? 높아지기 위해서 입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세상에서도 높아지고 하늘에서도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렇게 높아지는 방법론으로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내가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는 방법론으로 이 말씀을 읽고 적용하신다면 이 말씀조차 그 뜻과 의미를 왜곡하여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말씀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지금 빌립보 교회 안에 서로 다툼이 일어나기에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다른 번역으로 보면 이 태도를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그 행동을 따라 하라는 것입니까? 빌립보 교회의 문제를 보면 분명히 그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높아지심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적인 내용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로 이루어내신 일입니다. 우리는 그 일의 혜택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추신 그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들었다는 사람들 중에 이런 말씀을 들을 때에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전적이 죄인인데 어떻게 자기를 낮출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내 성질대로 살 것입니다. 어차피 죄인인데 그냥 이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저에게도 이러한 문제로 문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이 나오는 것은 복음을 듣기는 하였는데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식적으로만 받아들였다고 봅니다. 이런 경향을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영적인 지식만 있으면 자신은 구원을 받았기에 내가 몸으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이 마치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의 삶인 양 말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복음이 과연 그런 것일까요?

 

다시 본문 5절을 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도들의 이런 권면의 내용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이렇게 만들어 내신다는 하나님의 자기 약속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이루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리스도의 이 마음을 품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자기 의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마음을 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겠다는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사도행전 7:55~60절입니다.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 집사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들은 자들이 이를 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씀과 구약의 선지자들이 오리라고 예언한 그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니 그들이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그때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보는데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하자 사람들이 돌로 쳐 죽입니다. 그때에 스데반 집사가 하는 말이 자신의 영혼을 주 예수님께 부탁하면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합니다.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이런 일이 인간인 스데반에게 일어난 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 일이 스데반 집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내용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충만을 구하여야 할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하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는 것이 싫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없다고 하지는 않습니까? 낮아지고 희생하는 것이 싫어서 성경조차 왜곡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이 맞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회개하고 우리도 이러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달라고 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의 충만함을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고 내가 소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한다면 이것은 내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높아지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각주를 보면 하나님의 형체라고 합니다. 이 말을 하는 바울은 예수는 이단의 괴수이며 예수를 믿는 자를 다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일 때에 옳다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본체 이셨지만이라는 뜻으로 말합니다만 헬라어의 부사를 보면 하나님의 본체 이셨기에자기를 비워 오셨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은혜로운 표현이지만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은 두 번째가 더 좋은 표현으로 봅니다.

 

본문 7절입니다. 하나님과 본체가 동등하신 예수님께서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심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종의 형체라고 하는 형체와 하나님과 본체라고 하는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형체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수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만 수납이 됩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본문 8절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으로 오신 것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낮아지십니다. 자기를 낮추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그 복종이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겉모습만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사람이 되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죽음에 이르십니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 분이신데 완전한 사람이 되심으로 죽음에 이르시는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0:28절에서는 하나님의 피라고 합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피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피가 죄를 속하는 것입니다.

 

본문 9~11절입니다. “봉독 이러므로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본체가 동등하신 분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 곧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그 이름이 입니다. 성경에서 주라고 부르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너무 거룩한 이름이기에 여호와를 호칭하지 못하고 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그리스도로 호칭하는 것이 가장 뛰어난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를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이런 주님이시기에 산자나 죽은 자나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어떤 예수님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죽으심은 유대인들에게는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며 어떤 표적도 아니기에 거리끼는 죽음이며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입니다. 그런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원하지 낮아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겠습니까?

 

그러나 그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자들이 나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님의 영을 넘겨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일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자들은 구원을 얻는 자들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예수님이 영광 중에 계시는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다만 성경의 기록된 계시를 통하여 믿음으로만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스데반이나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본 것을 기록한 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이 말은 지금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언제 무릎을 꿇습니까? 아주 높은 사람에게 꿇습니다.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꽃을 주면서 무릎을 꿇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가 저주 받아 죽은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태하신 백성들은 그 마음을 낮추어주십니다. 그 눈을 낮추어주십니다. 이 과정이 성도에게는 아픔이며 상실이며 환난이지만 그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고 가난하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인다면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이며 천국이 이들의 것입니다.

 

이사야 45:22~25절입니다. “22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23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 24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25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

 

여호와의 구원이 어떻게 일어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의지하는 자는 무지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우상에서 돌이키는 것은 언약하시고 언약하신 바를 이루어내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그 언약이 성취는 날 곧 그 구원의 날에 모든 무릎이 꿇고 그 혀로 맹세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이 약속의 성취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이 구원이 일어나는 것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곧 심판이 됩니다.

 

히브리서 2:5~9절입니다. “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 그를 2)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3) 8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2)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 인자에게 복종하게 하신다고 시편 8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인자가 오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성취하셨지만 아직 만물이 그 발아래에 복종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이미 묵시 속에서는 완성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들은 이미 그의 발아래 밟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 중에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의 발아래 복종함이 구원입니다.

 

10~13절입니다.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 온전하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14~18절입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4)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자기를 비워 종으로 모습으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히브리서를 통하여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구원이 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이 역사 속에서 미련하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주와 그리스도로 시인을 하는 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무릎을 꿇는 것은 심판이 됩니다.

 

성경이 계시한 이런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형제들 앞에서 자기를 높일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나보다 남을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살펴본 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일을 우리에게도 넘겨주십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이루어내신다는 뜻도 함의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하게 된 자들이 사는 곳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이러한 천국을 미리 맛보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맛보게 되면 더욱 완전한 그 천국을 사모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