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23~24 율법의 더 중한 바 2017. 4. 2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하였습니까? 하지 않았습니까?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였습니다. 어느 정도로 열심히 십일조를 하였는가 하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집 마당가에 심은 산초와 방아와 같은 향신료로 사용하는 것까지 십일조를 계산하여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저주를 퍼 붓고 계십니다. 십일조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는 자들에게 왜 화 있을진저! 하고 저주를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율법의 더 중한 것을 버렸다고 합니다. 십일조도 율법에 포함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율법의 조문은 철저하게 지키면서 율법의 더 중요한 뜻을 버렸다고 합니다. 율법의 더 중한 바가 무엇입니까? 율법의 조문을 지키는 것보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더 중한 것을 말씀드리니 영화 곡성의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아역으로 나온 배우가 눈을 치켜뜨면서 자기 아버지에게 무엇이 더 중한 디?’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이 유행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 것입니까? 곡성이라는 영화 포스트에 절대 현혹되지 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구절도 여러 구절 인용이 됩니다만 이 영화에서 누가 미혹하는 자인지 잘 모르게 설정이 되어 있습니다. 온 사방이 다 의심을 살만한 인물들로 설정하여 두었습니다. 이런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현혹되어 사는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중한 지 정신을 똑 바로 차리고 보셔야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조문을 지킬 뿐만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까지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섬기면 그 결과로 자신들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십일조를 통하여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지 아니 주시는지 시험하여 보라는 말라기 말씀을 가지고 오늘도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을 합니다. 이 말씀도 나중에 보겠습니다만 이 십일조에 대하여서는 제가 구약 본문을 볼 때에 이미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에 걸쳐서 십일조를 총 정리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율법의 조문을 다 지킨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예수님은 저주하십니다. 그 이유는 율법의 더 중요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더 중요한 뜻을 지키지 않고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는 것으로 그들의 의무를 다 한 것으로 말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신약에서 십일조를 하라는 말씀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죄인인 인간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나올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돈의 십분의 일이야 드릴 수 있지만 의와 인과 신이 되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만이 아니라 모든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은 십자가로 완성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십일조를 하라는 말씀이 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면 십일조가 무엇인지 성경을 봅니다.

 

창세기 14:17~20절입니다.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람이 자기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318명의 군사를 끌고 소돔과 고모라를 정복한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주변의 다섯 왕들이 12년간 그돌라오멜왕을 섬기다가 배반을 합니다. 그러자 그돌라오멜이 다른 왕 세 명을 동원하여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하면서 소돔과 고모라까지 초토와 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이 그돌라오멜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 전쟁으로 아브람의 조카 롯 까지 사로잡혀 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이 318명의 군사와 주변의 조력자를 구하여 이들을 추격합니다. 아브람이 다른 용병을 좀 구하였다고 할지라도 소돔과 고모라성의 다섯 왕의 연합군을 이긴 그돌라오멜을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아브람은 작은 무리의 족장이지만 다른 자들은 이미 왕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아브람이 그돌로오멜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조카 롯을 구하여 오면서 포로로 잡혀간 다른 나라의 사람들까지 다 구하여 옵니다. 이들이 거두어온 전리품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대승을 하고 오는 아브람을 소돔 왕이 맞이하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맞이합니다.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이 멜기세덱에 대하여는 나중에 찾아보겠습니다만 이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천지의 주재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도록 간구하고서는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최초로 나오는 십분의 일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십분의 일을 바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아브람이 십분의 일을 바친 것입니까?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온 것은 결코 자기의 능력이 아님을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음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이유는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십분의 일을 최초로 바친 이유입니다. 그리고 소돔 왕이 자기 백성들만 돌려주고 모든 전리품을 가져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너로 인하여 내가 치부하였다는 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하면서 소돔 왕의 소유물을 하나도 취하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최초로 십분의 일을 바친 이 내용이 율법에서 어떻게 수용되는지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약속을 하실 때에 땅과 씨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씨를 통하여 열국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람이 받은 이 씨는 여러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 그리스도임을 갈라디아서 3:16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시는 약속이 땅과 씨가 되는데 그 씨를 통하여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신 그 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을 받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이 받은 복입니다.

 

그러면 땅의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사대 동안 다른 나라에 객이 되었다고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합니다.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내립니다. 마지막 재앙은 장자의 죽음입니다. 짐승도 처음 것의 수컷은 죽음을 당합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넘어갑니다. 이것이 유월절이입니다. 장자는 가족을 대표합니다. 유월절을 기점으로 출애굽 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로 옵니다. 이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언약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 언약의 말씀들 안에 십일조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광야 40년은 농사를 지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약속의 땅이 아니기에 십일조도 없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십일조를 하도록 합니다.

 

레위기 27:30~33절입니다. “30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31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32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33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34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시내 산에서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기에 여호와의 성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짐승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게 하여 열 번째 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십일조를 구별할 때에 우열을 가릴 수 있기에 짐승의 떼를 차례로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지나게 하고 매 열 번 째 짐승을 십일조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의 소산물 중에서 십일조를 드리지만 수확의 시기가 다르기에 곡물이나 과일의 시기를 따라 십일조를 드리는 기간이 있습니다. 짐승은 한 해를 단위로 그 해에 태어난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드립니다. 이러한 부칙들까지 지켜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십분의 일을 드리라는 제도를 만든 것입니까? 최초의 십일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람이 전쟁에서 대승을 하고 돌아올 때에 살렘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 축복을 받고 보니 자신의 승리가 누구의 도움으로 일어난 것입니까?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붙여주신 전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림으로 나의 승리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십분의 일을 제사장에게 드리는 것은 아브라함의 십분의 일을 드림이 재현되는 것입니다.

 

유월절 밤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처음 태어난 수컷은 살아남았습니다. 이것은 대표의 원리이기에 모두가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태어난 수컷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여호와께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십분의 일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단지 수량적으로 십분의 일이 아니라 누가 대신 희생하느냐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장자의 드림이며, 토지소산의 맏물이 십일조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의 의미는 처음 것, 가장 좋은 것, 기력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여호와께 드려져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모든 장자를 대신 할 지파를 세우십니다.

 

민수기 3:12~13절입니다. “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맏이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스라엘은 야곱의 12아들이 12지파가 된 민족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희생하여 가족을 살려냄으로 장자의 명분을 얻어 두 몫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두 지파가 되기에 이스라엘은 12지파가 아니라 13지파가 됩니다. 그런데 레위지파를 제사장 지파로 돌림으로 여전히 12지파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처음 태어난 장자와 처음 태어난 수컷을 여호와께 드려야 하는데 레위지파가 대신담당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레위지파 자체가 장자를 대신하여 희생하는 지파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땅을 받지 못합니다. 땅을 받은 12지파의 십일조를 받아서 사는 자가 레위지파입니다.

 

민수기 18:25~29절입니다. “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6 너는 레위인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받아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27 내가 너희의 거제물을 타작마당에서 드리는 곡물과 포도즙 틀에서 드리는 즙 같이 여기리니 28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되 29 너희가 받은 모든 헌물 중에서 너희는 그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하게 한 부분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가 여호와께 드려지는 대신에 레위지파가 그 역할을 대신합니다. 그러므로 나머지 열두 지파가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줍니다. 레위인은 그 십일조 중에서 다시 십일조를 아론에게 줍니다. 아론의 계열은 제사장 직분의 계열입니다. 레위지파가 성막의 다른 일들은 하지만 제사장의 직문의 아론의 계열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십일조를 통하여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브람이 여호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자신이 승리하게 된 것을 알기에 여호와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한 것처럼 지금 약속의 땅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땅을 여호와의 전쟁으로 취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여호와의 언약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제사장에게 합니다.

 

레위기 25:23절입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2)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약속의 땅은 다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고팔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경작권만 팔수 있지만 언제든지 되 물릴 수 있습니다. 되 물릴 형편이 안 되고 물려줄 친척이 없다면 희년이 되면 원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 땅의 주인이시기에 여호와의 것을 무상으로 분배하여 주신 것이 약속의 땅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모든 소출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주 2)의 내용을 보면 소작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소작료가 십분의 일입니다. 이것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세상의 어떤 소작료도 십분의 일인 소작료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가 되었을 때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돈으로 양식을 사고 돈이 떨어지자 짐승을 팔아 양식을 장만합니다. 그래도 흉년이 계속되자 토지까지 팔아서 양식을 구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토지를 바로의 소유로 하였습니다. 그 땅을 다시 백성들에게 소작으로 주면서 소작료를 5분의 1로 하였습니다. 요셉이 왜 이런 정책을 펼쳤는지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굶어 죽어가는 입장에서 땅을 소작 얻어서 5분의 1을 낸다는 것은 아주 가벼운 소작료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소작료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조선시대는 약 3분의 1일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50~70퍼센트까지였습니다.

 

해방 후 혼란기에 소작농들이 대부분인 이 땅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인기가 있었던 것은 토지정책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대지주들의 땅과 친일 앞잡이의 땅을 무상으로 몰수하여 무상으로 가난한 농민에게 분배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산주의자들에 대비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유상으로 몰수하여 유상으로 분배하자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물론 좀 싼 가격으로 몰수하여 싼 가격으로 분배하였습니다. 저도 소작농의 아들이기에 이런 토지정책 문제를 아버지께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소작농들이 땅을 살 수 있는 표를 받아도 그 땅을 살 돈이 없기에 다시 그 표는 돈 있는 사람들에게로 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아파트를 재개발할 때 입주권이 주어져도 가난하면 들어가지를 못하기에 자꾸만 가난한 동네로 밀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을 무상으로 받았습니다.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주인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품꾼이며 소작인입니다. 그렇다면 그 소작료를 십분의 일을 내게 하신 것은 지주가 너무 후한 지주가 됩니다. 그런데 그 십분의 일로 무엇을 합니까? 땅이 없는 레위지파에서 주어서 성전의 제사가 유지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십일조와 성전의 제사를 통하여 장자의 희생으로 담아내는 것이 십일조와 제사에 들어있습니다. 장자는 땅이 없습니다. 그런데 땅이 없는 자가 제사를 통하여 속죄함으로 그 땅이 복을 받아서 비가 내리고 농사가 되게 하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는 장치가 됩니다.

 

토지나 태백산맥과 같은 대하소설들을 보면 이 나라 소작농들의 아픔이 잘 나옵니다. 소작인들은 50퍼센트가 넘은 소작료를 내야 할 뿐 아니라 소작을 관리하는 지주의 마름들에게서도 시달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지주가 소작을 주는데 자자손손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주면서 소작료는 겨우 십분의 일만 내게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가난한 소작농들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이런 지주가 있다면 평생 그 지주의 소작농으로 살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을 종살이 했습니다. 요셉이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요셉이 죽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들이 일어나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으로 부렸습니다. 자기 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시간이 없습니다. 노예로 중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노예들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대로 출애굽 시킵니다. 그 바탕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언약과 사랑이 출애굽의 원인이 됩니다.

 

이렇게 출애굽 시킨 자들을 약속의 땅에 들여놓습니다. 여호수아보다 앞장선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정복도 그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죄악이 관영함으로 그 원주민들을 그 약속의 땅이 토하여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여호수아의 정복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그 땅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땅에 약속의 백성들을 심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에게 십일조를 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어떤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의 용도도 땅이 없는 레위인이 받아 제사를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도 십일조의 혜택을 받게 합니다. 그래서 삼년에 한 번씩 십일조를 더 내게 합니다. 이것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내용입니다.

 

신명기 14:28~29절입니다.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이 본문의 바로 앞의 말씀을 보면 십일조를 한 사람들이 그 십일조를 함께 먹고 마실 수가 있습니다. 물론 제사장에게 구별되어 가는 것이 있지만 십일조가 제사장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먹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알게 하시는 장치가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으로 율법조문을 지키는 시늉을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미가서 6:6~8절입니다.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엄청난 제물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것은 정의와 인자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느라고 텃밭의 향신료조차 십일조로 드리는 자들이 그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누가 이렇게 온전한 십일조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율법의 조문을 따라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십일조를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이루어 낼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으로서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저것도 온전하게 이루어내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거의 대부분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아브람의 십일조와 약속의 땅에서 십일조를 드린 뜻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아브람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린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명하는 것이 십일조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십일조는 토지소산의 맏물을 드립니다. 짐승의 초 태생은 당연히 구별하여 드릴 뿐만 아니라 짐승의 십일조도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일조를 통하여 제사가 드려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짐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에 대한 의미도 완성이 되었습니다. 제사장 제도가 없어집니다. 특별한 약속의 땅이나 제사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의 제도도 사라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히브리서 7:1~7절입니다.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자라 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논란의 여지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 바친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십일조를 바친 것은 이미 레위지파도 아브람의 허리에 속하여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레위지파를 통하여 오지 않고 유다지파를 통하여 오는 것도 멜기세덱과 연결시킵니다. 그러면 아브람이 십일조를 바친 것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십일조를 바친 것은 결국 누구에게 바친 것이 됩니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통하여 누구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당연히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일조 자체가 사람이나 짐승이나 토지소산의 맏물로 드려져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맏아들이 희생하심을 통하여 나머지가 거룩하여 지는 것을 십일조와 멜기세덱을 통하여 보여줍니다.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히브리서 7장에서 10장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율법으로는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폐하고 온전하고 완전한 언약을 세우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새 언약의 백성들은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더 이상 제사를 드릴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는 언약의 완성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의 완성도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최근에 딱 한분이 물어보았습니다. 십일조 봉투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기에 연보로 하라고 했습니다. 연보란 자원하여 감사함과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십의 일을 작정하든지, 십의 이를 작정하든지, 그보다 적게 하든지 간에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시면 됩니다. 이런 내용은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 잘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보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부요한 분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것이 연보입니다(고후8:9).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연보를 받고 사는 자라는 고백이 우리의 연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보는 율법조문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감사와 자원함과 풍성함으로 하게 됩니다. 이러한 연보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힘에 지나치도록 하여도 기쁨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러한 연보에 대한 내용은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씀보다 딱 잘라서 얼마를 하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율법의 조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이며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영은 새 언약을 담고 온 그리스도의 영을 말합니다.

 

이 영이 임한 자는 그 영의 인도를 따라 연보를 하면 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법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된 새 언약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런 자들은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그 놀라운 은혜 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연보입니다. 십일조의 완성이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연보의 삶입니다. 이런 사랑을 수치로 계산한다면 사랑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나타난 그 사랑 더 알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