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1~14 혼인잔치 비유 2017. 1. 15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백성의 지도자라는 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네가 무슨 권위로 이렇게 하며 누가 이런 권위를 주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질문하시면서 그 질문에 답을 하면 무슨 권위로 이렇게 하는지 알려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신 질문은 세례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사람에게서 왔는지 물으시자 그들이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면 그가 증거 한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백성들로부터 돌을 맞을 것 같으니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째는 두 아들의 비유였습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자 대답을 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싫다고 가지 않겠다고 하고서는 나중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갔습니다. 결론적으로 순종한 자는 둘째 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보다 세리들과 창녀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의의 도로 왔지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는 믿었다고 합니다. 즉 세례요한이 증언 한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심판을 당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악한 포도원 품꾼 비유였습니다. 지난주 본 말씀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종들을 때리고 죽이더니 결국 아들조차 죽여 버림으로 그 포도원을 자신들의 소유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포도원 주인이 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그 비유의 말씀을 듣고 질문을 받은 자들이 그들을 진멸하고 다른 사람에게 세로 줄 것이라고 합니다. 평행구절을 보면 이 비유의 뜻을 알아들은 자들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그 말씀이 성취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인줄 알고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지만 무리가 무서워 당장 그렇게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세 번째 비유로 혼인잔치 비유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합니다. 여기서 임금이란 하나님 아버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며 그 아들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구약에서 혼인관계로도 말씀하고 있기에 이런 비유는 유대인들이 잘 알아듣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31장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새 언약을 말하면서 옛 언약의 한계를 말합니다. 남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내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을 잡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었지만 그들이 언약을 배반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따라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한다고 합니다. 그 새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새 언약을 체결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길입니다.

 

요한복음 3:28~29절입니다. “28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 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갑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 말을 요한에게 전하자 요한이 하는 말이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증언할 자는 너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지만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한다고 하면서 자신은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다고 합니다. 구약 성도들의 자리를 신랑의 친구로 봅니다. 신약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봅니다. 이 말은 신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완성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9:14~15절입니다.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을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면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전할 때에 우리가 금식할 때는 우리의 영원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희미하게 된다면 금식할 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한복음 3장의 말씀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신랑으로 소개하고 마태복음의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신랑이라고 합니다.

 

본문 3~5절입니다. 천국은 임금이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두었습니다. 그래서 종들을 보내어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청한 사람들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어 부지런히 부르신 것입니다. 마치 어미 닭이 새끼를 불러 모으듯이 그렇게 부르셨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임금님은 그래도 다른 종들을 보냅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부를수록 오히려 멀리 달아났다고 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임금님이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두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우리가 무엇을 들고 갈 것이 없는 곳입니다. 우리의 공로나 마일리지 쌓아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다 갖추어진 그 잔치에 그냥 가면 됩니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처럼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마지막으로 그 아들마저 죽여 버린 자들을 진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 것처럼 오늘 비유의 말씀에서도 이들은 진멸의 대상이 됩니다.

 

본문 7~10절입니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릅니다. 지난주의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살해당한 이 땅을 진멸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런데 혼인 잔치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잔치에 먼저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네거리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고 합니다.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있습니다. 왜 임금이 초대한 자기 아들의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가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임금이라고 하여도 그 잔치에 가고 아니 가고는 나의 주권에 달렸다고 생각하면 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잔치에 가는 것을 거절한 이유가 자기 밭으로 가고 자기 사업을 위하여 간 것입니다. 이들은 다 할 일이 많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대를 한 것입니다. 유대의 결혼식은 한번만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초청을 해 두었다가 잔치가 임박하면 또 종들을 보내어 초청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잔치에 갈지 안 갈지를 어떻게 결정하는 가하면 유대인의 풍습을 따른 해석을 보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초청하는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명예를 중요시 여기는 사회에서 나보다 높은 사람이 초청하면 갈 마음이 있겠지만 나보다 격이 떨어지는 사람이 초청하면 내가 그 잔치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나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기에 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나와 함께 초청 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본다고 합니다. 함께 초청받은 사람들의 수준을 보면 그 잔치의 격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잔치에 초청 받는 사람들도 살펴본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나를 잔치에 초대하기 위하여 온 종들이 어떤 자인지 보는 것입니다. 높은 사람일수록 높은 직급의 사람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초청하려고 보낸 사람이 직급이 아주 낮은 사람이라면 내가 그 잔치에 가도 말석에 앉게 되기에 가기가 싫은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의 마음도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청첩장을 받았을 때에 가고 아니 가고의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부조를 했느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박정구집사 부친 문상을 많은 교인들이 왔습니다. 총각인데도 경조사를 부지런히 다닌 것을 제가 봤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고 처음 오신 분들도 많았습니다만 우리는 어디에 가고 아니 가고의 결정을 나의 가치와 연결시킵니다. 그런데 임금이 초청한 잔치는 내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잔치입니다. 그저 가기만 하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 가기가 싫다고 거절한 자들이 율법의 의로 의롭다고 여기는 대세자장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백성의 장로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선지자들의 초청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의 초청도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은 진멸하고 이제 길거리에 가서 아무나 초청하여 오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4:21~24절입니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는 이 말씀을 흔히 전도하라는 말씀으로 사용합니다만 이 말씀은 전도에 대한 내용이 아닙니다. 임금님의 잔치를 거절한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말씀하시면서 이제 아무나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데려온 자들인 어떤 자들입니까?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 저는 자들입니다. 전에 성경에서는 병신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임금이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놓은 잔치에 아무른 자격이 없이 온 자들입니다. 감히 임금의 잔치에 올만한 자들이 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처음 청함을 받은 자들이 거절함으로 장애인과 세리와 창녀와 이방인들까지 이 잔치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31:7~8절입니다. “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8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예레미야 31장은 새 언약과 연결되는 장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구원받아 오는데 어떤 모습입니까?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들입니다. 자기 힘으로 오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런 잔치에 가고 싶습니까? 임금님이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놓았으니 거저 가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데 막상 가서 보니 어떤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세상에서 내세울 만한 사람들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외면하는 그런 자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모인 잔치에 들어가겠습니까? 잔치 분위기 보고 돌아서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본문 11~13절입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복의 이야기가 없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예복의 이야기가 있는 것을 자유주의 신학자는 교회가 무언가 자격을 갖추어야 할 것으로 마태복음에서 예복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복을 입는 것이 오히려 전적인 은혜를 구하는 모습입니다. 임금이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게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고 물으시는데 아무 말도 못합니다. 그러자 임금이 사환들에게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곳에 내던지라고 합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복을 입지 않는 자가 왜 쫓겨나는지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잔치에 가려면 예복을 입고 가는데 대부분 흰 옷을 입고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잔치는 길가다가 초청받아 왔습니다. 언제 집에 가서 흰 옷을 갈아입고 올 겨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럴 때는 임금이기에 예복을 준비해 놓고 있다가 옷 없는 자들에게 주면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0장을 보면 예후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죽이기 위하여 예복을 입힙니다. 바알을 섬기는 잔치에 참여하게 하고 그들에게 예복을 입혀서 그들을 죽입니다만 그러나 오늘 잔치의 비유에서는 아무른 자격이 없는 자들이 단지 예복을 입음으로 그 잔치에 참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으로 말하지만 이 사람이 많을까요? 적을 까요? 오늘본문 10절을 봅니다. 종들이 나가서 누구를 잔치에 초청하여 옵니까? 악한 자나 선한 자나 아무나 데리고 옵니다. 그러면 악한 자로 표현되는 자들은 잔치에 전혀 참여할 자격이 없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남은 자와 누가복음의 병신들과 맹인들과 다리 저는 자들이 악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아무것도 준비 된 것이 없어서 주인이 주는 옷을 입고 가면 감지덕지입니다. 잔치집 주인이 임금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두었습니다. 예복만 입으면 들어가서 그 잔치에서 먹고 마실 수가 있습니다. 배고프고 주린 자들은 정말 복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선한자도 뒤섞여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율법적인 의를 주장하는 자들이든지, 양심적으로 깨끗하게 살았다고 하든지, 나는 너희들과 격이 다르다고 여기는 자들은 잔치에 오기는 했지만 영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똑 같은 옷을 입음으로 자신의 우월함이 드러나지 않기에 그 일방적인 은혜를 거절한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열심을 낸다고 하였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기에 자기 의를 쌓기 위하여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그 복음을 배척한 자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4절에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복을 안 입은 자들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이 예복을 입으려면 자신의 자존심이 다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자아라는 허상이 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택함을 입은 자라면 주님 주시는 그 의의 옷으로만 만족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들리는 자는 마음이 낮추어집니다.

 

금요일 아침에 정 집사님 부부가 5층의 강대상용으로 쓸 알맞은 것을 들고 왔습니다. 그래서 5층에 갔다가 오는데 4층에서 어떤 부부가 나오는 것입니다. 뉴질랜드에서 오셨는데 금요일 공부하는 줄 알고 왔답니다. 두 부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학원 잘 하다가 망한 부부와 뉴질랜드에서 대학 안의 큰 카페를 하다가 불이 난 부부가 만났습니다. 제가 그 분들에게 말씀드리기를 그런 일들을 통하여 복음이 들려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승승장구를 하고 있을 때에 오늘 잔치와 같은 자리에 부른다고 가겠습니까? 병신들과 맹인들과 다리 저는 자들이 우글거리는 그런 잔치에 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복을 입는 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마음이 낮추어져야 하는지 어떤 환난을 당해야 하는지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7:9~12절입니다.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44천이 나오는 본문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144천 따로 있고 흰 옷 입은 큰 무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의 온전하게 구원받은 자들이 흰 옷을 입는 큰 무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찬송의 내용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천지는 144천과 흰 옷 입은 무리를 구별하여 앞의 구원은 높은 수준의 구원이고 뒤의 흰 옷 입은 무리는 낮은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144천은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노력으로 차지하게 된다면 이들이 바로 예복을 입지 못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44천이 나 흰 옷 입는 무리나 간에 오직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희게 한 자들입니다.

 

이어지는 13~17절입니다.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흰 옷 입은 무리들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큰 환난을 통하여 무엇을 알게 됩니까? 자신들이 믿는 것들이 무너져 내립니다. 자기들의 의라는 것도 부수어집니다. 그리하여 오직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개한 자들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 위에 장막을 치시고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고 어떤 기운에도 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어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19:7~10절입니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습니다.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습니다.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신부는 어린 양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그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러면 신부가 준비하고 단장할 것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 어린 양의 피로 입혀주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는 것입니다. 이 옷은 우리가 만들거나 갖추어 입을 수 없기에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의롭게 된 자들이 어린 양의 신부입니다. 이들이 입은 세마포 옷을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완성하신 그 의를 전가 받은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