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24~30 수로보니게 여인 2019. 3. 31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합니다. 항상 악하기에 인간 스스로는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라는 단어를 붙일 수도 없습니다. ‘스스로란 스스로 계시는 분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타락한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인줄 착각하고 스스로를 말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사망 아래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의와 생명 안으로 옮겨주시기 않으시면 우리는 죄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멸망을 받아야 할 전적으로 더러운 자들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이 내용을 우리가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것은 기적입니다. 모든 인간의 이성으로 인간됨을 말하는 논리와 가치들이 다 포기되어야 합니다. 아담의 타락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단 한순간도 자신의 신 됨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존심(自尊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도 스스로 높이는 마음이 자존심인데 이것을 성경은 근원적인 죄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자존심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이런 자존심이 다 날아간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이 개로 취급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거기를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곳이란 갈릴리 호수 근처입니다. 이곳에서 병을 고치시고 또 부정함과 정함에 대하여 말씀하신 후에 두로 지방으로 갔습니다. 두로 지방은 유대인들에 의하면 완전한 이방인의 지역입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우습게 여기는 곳이지만 그래도 유대인들이 주로 사는 곳이지만 두로는 이방인들만 사는 곳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북서쪽에 있는 두로는 지중해 바닷가에 위치한 도시로 무역으로 아주 부요한 도시입니다.

 

구약성경에 두로에 대한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두로 왕 히람은 다윗이 왕궁을 지을 때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에 백향목과 석수와 목수를 보낸 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괴롭힌 일도 많은 나라입니다. 두로 왕이 무역으로 인하여 상당한 부를 가지게 됩니다. 어느 정도로 높아졌는지 에스겔 28:2절을 보면 두로 왕의 마음에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마음이 하나님 같은 체 하여도 사람이요 신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도 형편이 안 되어서 이렇게 살아가지 누구든지 두로 왕의 자리에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신이라고 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러한 두로는 예수님 당시에도 경제적으로 갈릴리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두로 사람들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다시본문 24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예수님께서 두로 지역에 가셔서 자신을 숨기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옵니다. 그러면 왜 숨기려고 하셨을까요?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무리가 몰려오니 식사하실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용한 쉼과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많은 무리가 몰려온 것은 그들의 집단적인 소원을 이루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경제문제 해결하는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기에 피하십니다. 이때 한 여인이 나옵니다.

 

25절입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옵니다. 우리가 지난주 까지 세 번에 걸쳐서 살펴본 내용이 정함과 부정함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후에 보는 구약의 레위기도 정함과 부정함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으로는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도 부정하다고 여기는데 예수님은 이방인의 지역에서 이방인의 여인을 만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린 것입니다. 이방인의 지역은 더러운 땅으로 여기는데 그곳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립니다.

 

제가 두로 지역에 대하여 간단하게 말씀드린 이유는 이 여인의 자세와 두로 왕의 말을 비교하기 위한 것입니다. 두로 왕은 무역으로 부자가 되었기에 자신을 신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로 땅의 한 여인은 자기의 딸이 더러운 귀신이 들려 고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하지만 이방인들 특히 두로와 같은 부요한 지역의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더 멸시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런 두로지역에서 수로보니게족속의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 발아래 엎드립니다.

 

26절입니다. 이 여자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이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합니다. 이 여인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개처럼 취급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서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물론 자기 딸이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는 그 절박함이 있어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그런 절박함 때문에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다고만 볼 수가 없는 이유가 다음에 나옵니다. 사람이 아무리 절박하여도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그 절박함도 감수하는 것이 인간의 자존심입니다.

 

27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게 한다고 하신 것은 단지 떡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온전한 구원을 말합니다. 6장에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8장에서는 사천 명을 먹이시는 내용이 나옵니다만 떡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일차적인 구원의 대상은 자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십니다(15:24). 그러므로 먼저 자녀를 먹여야 하는데 그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 여인을 개라고 한 것입니다. 딸이 더러운 귀신 들려 절박한 상황이라고 하지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28절입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여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주여 옳다고 합니다. 몇 주 전에 주님이 옳습니다!’라는 찬양을 찬양대에서 했지요! 주께서 나를 외면해도 주님은 옳다는 그런 가사였는데 이 여인이 자신을 개처럼 취급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자존심을 낮추어 자기 딸을 고치려고 하는 모성애로만 보면 안 됩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본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나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29~30절입니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 말이란 27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28절의 대답입니다.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는 말씀에 주님이 옳다고 하면서 그러나 개들도 아이들이 먹다가 흘리는 떡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러시면서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고 합니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가 침상에 누워있는데 귀신이 나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하였다는 그 말이 어떤 말인지 다른 본문을 봅니다.

 

마태복음 15:21~28절입니다.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의 이 본문 앞에서도 장로들의 전통으로 인한 논쟁이 일어난 후에 이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보면 이방 여인은 태어나면서부터 더러운 여인이기에 개같이 취급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께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전통으로 자신들을 거룩하다고 여기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이려고 의논하고 있는데 이방 여인이 예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하여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향하여 네 믿음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큰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믿음이 큰 것입니다. 그런데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가 있습니까? 율법과 사람의 전통으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깨끗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참으로 더럽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더럽다고 하는 이방여인을 믿음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믿음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이런 상황을 허락하신 것이며 예수님께 나아오게 하셔서 이런 고백을 통하여 우리의 죄가 무엇이며 믿음이 무엇인지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4:1). 이런 믿음이야 말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나온 믿음입니다(2:8).

 

사무엘상 24:14절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사울 왕은 악신이 들렸습니다. 소년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고 다윗은 동굴에 숨어 있습니다. 그 동굴에 사울이 용변을 보려고 왔습니다. 다윗은 단칼에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 옷자락만 벱니다. 사울이 나가고 난 후에 다윗이 사울에게 자신은 왕을 죽일 의도가 없다고 하면서 자신은 죽은 개와 같고 벼룩과 같다고 합니다. 다윗의 이런 고백이 자기 능력이 아니라 은혜임을 언제 알 수가 있습니까? 자신이 왕이 되고 나서 간음을 하고 살인을 하고 나서 처절하게 알게 됩니다.

 

사무엘하 9:6~8절입니다. “6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사울 사후에 다윗이 요나단과의 언약을 생각하여 므비보셋을 왕의 식탁에서 먹게 하고 그 할아버지 사울의 밭을 다 돌려줍니다. 왕권을 차지하였다면 왕권을 위협하는 왕족들을 다 멸하여야 반란의 빌미를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 때문에 므비보셋을 대접하자 므비보셋이 하는 말이 죽은 개와 같은 나를 이렇게 돌보아 주느냐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수로보니게 여인과 다윗과 므비보셋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지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로 자신이 개와 같고 벼룩과 같고 심지어 죽은 개와 같은 자임을 아십니까? 이런 소리를 듣고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어떤 분은 자리가 없다고 하니 통로에 신문지를 깔고서라도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대접을 하여도 오시겠습니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죄인 되어 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인 십자가로 찾아오신 것입니다(5:6~10). 이 사랑의 확증인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믿었다면 우리도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자손심이 펄펄 살아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낮추어주셔야 이 여인의 고백이 나올 것인지 저를 보면 아직 갑갑합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것은 주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26~31절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부르심을 입은 자는 아무도 자기 육체를 자랑할 수가 없도록 하시는 부르심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