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25:8~55 희년의 자유 2019. 12. 1

 

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 나팔을 크게 불지며 10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1)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11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지난주 극동방송 녹음하는 내용이 예레미야 34장의 내용이었습니다. 녹음을 하면서 희년과 연결되는 내용이라서 다시 정리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주에 본 희년은 안식과 자유를 주는 날입니다. 가난하여 땅이 팔렸고 심지어 종으로 팔린 자라도 희년이 되면 모든 것이 원상회복되는 참으로 기쁨이 충만한 날이 됩니다. 이러한 희년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희년을 이루려고 오신 예수님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그 희년을 성령을 보내어 이루어내셨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는 사도행전에서 자기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 자유를 잠시 맛보았습니다. 왜 잠시입니까? 아직도 몸의 구속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8:23).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희년을 맛본 자들은 그 완전한 영광의 날을 소망하여 살아갑니다.

 

예레미야 34:1~22절을 통하여 자유를 주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희년이 참된 안식과 자유인데 예레미야 34장에서 말씀하는 자유를 주리라는 것은 완전히 망하게 내 버려두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자유라는 말을 사용하여도 어떤 자유는 참된 안식과 기쁨을 맛보게 되지만 어떤 자유는 완전히 망하는 자유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류가 추구하는 자유라는 것이 다 멸망으로 달려가는 자유를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자유를 주어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억압받기를 원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에로의 도피라는 책에서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주어진 자유를 감당 못하여 오히려 억압 받기를 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참 자유와 심판 받는 자유가 무엇인지 봅니다.

 

예레미야 34:1~5절입니다. “1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통치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에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가서 유다의 시드기야 왕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 3 네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손에 넘겨져서 네 눈은 바벨론 왕의 눈을 볼 것이며 그의 입은 네 입을 마주 대하여 말할 것이요 너는 바벨론으로 가리라”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실 것이며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왕도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손에 넘겨지고 그 얼굴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선지자가 이런 말을 왕에게 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에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든지 가서라도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여야 한다고 처음 소명 시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의 힘에 떠밀리고 있기에 왕에게 나라가 망하고 사로잡힐 것을 말합니다

 

4~6절입니다. “4 그러나 유다의 시드기야 왕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5 평안히 죽을 것이며 사람이 너보다 먼저 있은 네 조상들 곧 선왕들에게 분향하던 것 같이 네게 분향하며 너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슬프다 주여 하리니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6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 모든 말씀을 예루살렘에서 유다의 시드기야 왕에게 아뢰니라 7 그 때에 바벨론의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읍들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더라

 

시드기야 왕의 죽음이 어떠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칼에 죽지 않고 평안히 죽을 것이며 백성들이 애통하며 선왕들에게 분향하듯이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52장에 보면 시드기야는 자기의 눈앞에서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아야 했으며 그 후에 두 눈이 뽑히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감옥에서 죽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시드기야는 평안한 죽음을 죽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기스아세가가 예루살렘과 함께 바벨론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시드기야 왕이 히브리 노비를 해방시키는 일을 합니다

 

히브리인이 동족을 노비로 삼는 경우는 히브리인이 살기가 힘들어 빚을 질 경우에 그 빚 대신에 자기의 몸을 종으로 파는 것입니다. 그러면 6년을 종으로 섬기고 나면 7년째는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15:12).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시드기야 때에 하나님께서 노비들에게 자유를 주라는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 왕이 백성들과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하게 됩니다. 이것은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지경에 자기들의 힘을 합하여 바벨론을 대항하기 위한 자구(自救)책으로 보입니다. 마치 아브라함 링컨의 흑인노예 해방운동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보다 정치적인 결정이 더 큰 것처럼 시드기야 왕이 정치적인 이유로 노비들에게 자유를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포위한 바벨론 군대가 물러간 것입니다.

 

예레미야 37:5절을 봅니다.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시드기야가 바벨론에 대항하고 있으며 또한 애굽에 원병을 요청하였기에 애굽에서 군대를 보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바벨론 군대가 잠시 포위를 풀고 예루살렘에서 물러갑니다. 이렇게 되었다면 시드기야 왕이나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노비에게 자유를 준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으로 여기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포위가 풀리자말자 곧 풀어준 노비들을 다시 잡아와서 노비를 삼아버린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8~11절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 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한 후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9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10 이 계약에 가담한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

 

노비들에게 자유를 주라는 직접적인 지시가 없었지만 나라가 멸망할 위기 속에서 자기들이 살아남을 자구책으로 노비들을 해방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율법을 순종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적들이 물러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호와의 율법을 순종하는 길이 살길이구나 하면서 율법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적들이 물러가니 마음이 바뀌어 다시 자유를 준 노비를 잡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왕이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가라고 한 후에 곧 다시 추격하여 잡아들이려고 오는 모습과 같은 모습입니다. 지금 유다도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12~16절입니다. “12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3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너희 선조를 애굽 땅 종의 집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이르기를 14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1)네게 팔려 왔거든 너희는 칠 년 되는 해에 그를 놓아 줄 것이니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 15 그러나 너희는 이제 돌이켜 내 눈 앞에 바른 일을 행하여 각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되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계약을 맺었거늘 16 너희가 돌이켜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 너희의 노비로 삼았도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 되었던 자들을 하나님의 언약과 사랑으로 해방시켜 약속의 땅에 들여놓으실 때에 시내산에서 피를 뿌려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땅에는 자유가 늘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6년 일하면 7년째 자유를 주어야 하고 또 희년이 되면 모든 종들이 자유를 얻고 경작권을 팔았던 땅도 아무 조건 없이 원 주인에게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도 땅도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말씀이 레위기 25장에서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을 통하여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가 율법으로 제정되어있기에 이방나라들의 빈익빈 부익부의 모습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서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어느 왕과 백성도 제대로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멸망하기 직전에 시드기야가 이런 일을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지만 노비에게 자유를 준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가 잠시 물러가자 풀어준 노비를 잡아온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힌 행위가 됩니다

 

17절입니다. “1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않고 다시 그들을 종으로 삼았기에 이제 여호와께서 이들을 대적하여 자유를 주신다고 합니다. 이 자유란 망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18~22절입니다. “18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매 내 앞에 언약을 맺었으나 그 말을 실행하지 아니하여 내 계약을 어긴 그들을 19 곧 송아지 두 조각 사이로 지난 유다 고관들과 예루살렘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20 내가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21 또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그의 고관들을 그의 원수의 손과 그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기리라 2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 성읍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의 성읍들을 주민이 없어 처참한 황무지가 되게 하리라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의 언약 체결장면도 짐승을 쪼개 놓고 지나가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이 일방적인 은혜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타는 불의 형상으로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실제로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노비를 둘 정도의 재력과 권력이 있는 자들 곧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 내시들, 제사장들 과 그 땅 모든 백성들을 모아서 송아지를 쪼개어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렇게 노비들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그러나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기자 다시 노비를 잡아왔기에 여호와께서 이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언약 체결이 쪼개진 짐승사이로 지나가는 것이기에 언약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쪼개지겠다는 목숨을 건 언약체결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어기게 되니 이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잠시 물러간 바벨론 군대가 다시 와서 유다는 멸망하는 것을 자유를 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70년이 되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옵니다. 이제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노비들을 법대로 풀어주면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는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왔지만 인간은 역사를 보고서 교훈을 삼을 만큼 지혜롭지 못합니다. 이렇게 가면 나라가 망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 망하는 길에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도 하나님의 언약과 사랑입니다. 애굽에서 나왔든지 바벨론에서 나왔든지 종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종은 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안식도 같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으니 이제는 동족을 노비로 삼지 말고 자유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느헤미야 5:1~5절입니다. “1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2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먹고 살아야 하겠다하고 3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4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5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 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왔지만 여전히 고리대금으로 자기 백성을 종으로 만들고 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느헤미야가 크게 노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고 다시 백성들과 언약을 새롭게 하여 동족에게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고 꾸어준 것의 백분의 일을 돌려주게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맹세시킨 후에 옷자락을 털며 이 언약을 배반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털어 버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나라가 망하여 돌아온다고 해도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옛 언약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새 언약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들은 어떤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로마서 8:1~17절을 오늘 주제와 연결하여 간략하게만 보겠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 묶여있는 자를 해방시키십니다. 이러한 일을 위하여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에게 죄를 정하시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내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의 다 이루심으로 의가 만들어집니다. 그 의를 선물로 성령으로 받은 자들의 새 언약의 백성이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릅니다. 이들은 영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영의 인도란 곧 말씀의 인도입니다. 말씀이 문자가 아니라 주님의 영으로 일하셔서 책망하고 훈계하며 의로 교육합니다. 또한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의 인도가 없이 단지 자신이 그동안 종교적인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며 자신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한 다면 이 사람은 참된 해방과 자유를 맛보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라는 말에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자유를 주리라는 말씀이 자유가 아니라 심판에 붙여버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자유를 좋아하지만 참된 자유란 주님께서 우리를 언약으로 붙들고 계시는 것이 자유입니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 주님의 십자가로 해방시키셔서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유란 주님의 언약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언약 곧 새 언약에 붙들려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인 줄 아는 자들은 아직도 죄와 사망의 종일뿐입니다. 중간지대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자유를 주신다는 이 자유란 그야말로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라고 말할 때에 어떤 자유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율법의 종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자유를 가지고 어떻게 사용합니까?

 

갈라디아서 5:13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종으로 팔린 상태로 섬김이나 율법아래의 섬김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피곤하고 힘만 들 뿐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로 자유를 얻는 자들은 사랑으로 종노릇합니다. 참된 자유로 사랑의 섬김만 가득한 곳이 천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