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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1~18 무엇이 두렵습니까? 2015. 12. 13

 

지난주에 본 열왕기상 22:51~53절을 먼저 보시면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어 이년동안 다스립니다. 오늘 본문 전체가 아하시야에 대한 내용입니다만 여기서 이미 아하시야에 대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아하시야는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으며 바알을 숭배하여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고 그의 아버지 아합의 온갖 행위와 같이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결론이 내려진 인생이 가는 길이 어떤지 오늘 본문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1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면 아하시야가 힘을 내어 다시 모압을 공격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그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서 병이 들었습니다. 가벼운 병이 아니라 심각한 지경이기에 그의 사자를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어보려고 보냈습니다. 여기서 왜 다락에서 떨어졌는지 그리고 왜 여호와께 묻지 않고 이방의 신에게 물어보려고 보냈는지 봅시다.

 

신명기 22:8절입니다.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새 집을 지을 때 난간을 만들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만약 난간을 만들지 않아서 사람이 떨어져 피를 흘리면 그 피가 그 사람의 집에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아하시야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은 아하시야는 율법대로 건축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다락 난간에서 떨어지게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하셨겠지만 아합이나 그 아들 아하시야는 율법에 관심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락 난간에서 떨어졌으면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봐야 하는데 왜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간 것입니까?

 

아하시야는 그의 아버지 아합의 온갖 행위와 같이 행하였다는 말씀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면 아버지 아합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자신이 전쟁에 나가기 위하여 누구에게 물었습니까? 자기에게 좋은 말 해주는 선지자들을 불러서 물어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평소에 좋은 말을 하지 않은 미가야는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 왕 때문에 할 수 없이 불렀지만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전쟁에 나갔다가 죽었습니다. 아하시야도 결국 자기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에게 물어보기 위하여 에그론의 바알세붑에게 묻기 위하여 사자를 보낸 것입니다. 여호와의 선지자에게 물어보면 자기에게 좋지 않는 말을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1~4절입니다.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굉장히 엄중한 명령으로 말씀을 전하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엄중하게 명하느냐 하면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자들이 자기 귀에 좋은 말을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1:9~10절입니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복음은 사람에게 좋은 소식입니까? 하나님께 좋은 소식입니까? 놀랍게도 하나님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은 사람들을 좋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위기에 취하였을 때에 인생에 답답한 문제가 있을 때에 누구를 찾아갑니까? 나의 문제를 해결하여 준다는 사람에게 갑니까? 너는 죽어야 한다는 사람에게 가겠습니까? 우리는 죽기 싫어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죽음에는 목숨 끊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실패하는 것도 포함되고 자존심 상하는 일도 포합됩니다. 죽기 싫어서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점치는 사람들에게 찾아갑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누구에게 찾아갑니까? 예언기도 한다는 사람에게 찾아갑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찾아가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을 합니까? 산다고 말합니까? 반드시 산다고 하지만 쉽지는 않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정성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무당 짓입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런 말에 넘어가는 것은 왜 그럴까요?

 

히브리서 2:14~15절입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엇에 종노릇하고 있습니까? 죽기를 무서워하는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한 평생 죽기를 무서워하여 매여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혈과 육이 되어 오신 것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죽음의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지 못한 자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본문 3~4절입니다. “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엘리야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말합니다. 아하시야가 보낸 사자에게 엘리야가 말하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고 책망하면서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으리라고 전하고서 엘리야는 다른 곳으로 갑니다.

 

본문 5~6절입니다. “5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니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하니 6 그들이 말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 7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 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1)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아하시야 왕이 보낸 사자들이 너무 빨리 돌아온 것을 보고 왜 돌아왔느냐고 합니다. 이들이 그 선지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다고 하면서 엘리야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그러자 왕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엘리야의 특징을 말하자 그가 엘리야인줄 압니다. 그러면 어차피 죽을 아하시야에게 왜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는 죽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까? 이 말씀을 누구에게 들으라고 오늘 이렇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죽음의 종노릇하는 자가 어떤 자인지 죽음의 종노릇에서 벗어난 자가 어떤 자인지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죽음의 종노릇에서 해방이 된 사람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죽음에 종노릇하면서 벌벌 떨고 있습니까?

 

본문 9~10절입니다. “9 이에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그가 엘리야에게로 올라가 본즉 산꼭대기에 앉아 있는지라 그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10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

 

이런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죽는다고 하였으면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여야하지 왜 엘리야를 부르기 위하여 군인 오십 명을 보냅니까? 그것도 군인 오십 명을 보낸 것은 그를 사로잡아 와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정말 선지자를 부르려고 한다면 한 두 사람만 보내도 됩니다. 그런데 군인 오십 명의 군대를 보낸 것은 사로잡아 오려고 한 것입니다. 오십 부장이 엘리야에게 하는 말이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에 내려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람을 왕의 명령으로 좌우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습니다. 오십 부장도 아하시야와 같은 사람입니다. 엘리야를 여호와의 사람이라고 말은 하지만 왕의 명령이 우선인 자입니다.

 

본문 9~10절입니다. “9 이에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그가 엘리야에게로 올라가 본즉 산꼭대기에 앉아 있는지라 그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10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오십 명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왕이 다시 오십 명을 보냅니다. 두 번째 오십 부장도 첫 번째와 똑 같이 말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오십 부장의 모습은 다릅니다.

 

본문 13~14절입니다. “13 왕이 세 번째 오십 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 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그의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14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전번의 오십 부장 둘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하매

 

이미 죽은 두 오십 부장과 무엇이 다릅니까? 죽은 자들의 모습의 보면서 세 번째 오십 부장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는지 아니면 그 전에 하나님의 대한 신앙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를 때에 무엇이 빠져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같지만 왕의 명령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오십 명의 생명을 귀하게 보아달라고 합니다. 자신과 오십 명의 부화의 생명에 엘리야에게 달렸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생사여탈권을 쥔 자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알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이때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합니다.

 

본문 15~18절입니다. “15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신지라 엘리야가 곧 일어나 그와 함께 내려와 왕에게 이르러 16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사자를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니 이스라엘에 그의 말을 물을 만한 하나님이 안 계심이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니라 17 왕이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 18 아하시야가 행한 그 남은 사적은 모두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엘리야도 아하시야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오십 부장과 함께 가서 아하시야에게 처음에 전한 말 그대로 전하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아하시야에게 가서 처음에 전한 그 말대로 전합니다. 그 말씀대로 죽고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됩니다. 이런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까? 아하시야가 오늘 우리의 모습이며 아하시야의 명을 받은 두 오십 부장이 우리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세 번째 오십 부장이 우리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엘리야가 우리의 모습입니까?

 

내가 살기 위하여 백 명이 죽어도 다시 오십 명을 또 보내는 자가 우리의 모습입니다. 나 살고 다른 사람 다 죽어도 된다는 것이 우리 인간의 악함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세에 빌붙어서 하나님을 왕보다 우습게 여기는 자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고 세 번째 오십 부장처럼 여호와의 두려움을 안다면 이런 자들이 심판 가운데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나라입니다. 남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이런 자들을 남기신 것은 오늘 이 세상에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66:1~4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1)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돌보시는 자는 여호와의 처소 곧 성전을 지어 바치는 자가 아닙니다. 어마 어마한 예물을 바치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볼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두렵습니까? 세상이 두렵습니까? 세상의 평가가 두렵다면 아직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부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가난하고 심령이 통회하는 자들이 되신다면 자신의 죽음보다 하나님이 말씀을 두려워합니다. 이런 자들은 죽음의 종노릇에서 해방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오히려 죽음을 기꺼이 환영합니다.

 

고린도후서 5:1~10절입니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이러한 소망이 우리 모두의 소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608장 후일에 생명 그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