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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4:1~7 산당이 무엇이기에? 2016. 8. 21

 

1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제이년에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된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호앗단이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4 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5 나라가 그의 손에 굳게 서매 그의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6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7 아마샤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이고 또 전쟁을 하여 셀라를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니라

 

본문 1절을 봅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 2년에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됩니다. 그런데 요아스가 어떻게 죽임을 당합니까? 요아스는 성전 수리를 했다고 해서 상당히 바른 왕으로 봅니다만 그러나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그렇게 살았지만 여호야다가 죽고 나자 바로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깁니다(대하24:18). 여호야다가 가르쳐준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와의 율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합니다. 이러한 다스림은 백성을 말씀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 왕은 백성들 위에 군림합니다. 백성들에게 군림을 하려면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제공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고대나 현대의 인본주의적인 정치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를 왕이 솔선수범하여 합니다. 이것을 백성들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산당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선지자들을 보내나 요아스가 듣지 않습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책망하자 스가랴를 여호와의 전 뜰에서 돌로 쳐 죽이고 맙니다(대하24:20).

 

이런 요아스가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됩니다(왕하12:19~21). 신하들이 왕을 죽였다면 반역입니다. 그러면 그 왕의 아들을 왕으로 추대하면 나중에 보복을 당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를 왕으로 세우게 된 것은 세상의 상식으로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왕조사를 보면 부모 형제간에도 왕권으로 다툼이 일어나고 복수혈전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남 유다에 반역한 신하들이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운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왕국에 다윗의 등불을 꺼지 않겠다는 약속으로만 설명이 됩니다.

 

2절입니다. 아마샤가 왕이 될 때에 25세였으며 그의 통치기간은 29년간입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호앗단이며 예루살렘 출신입니다. 그 어머니의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기쁨이다라는 뜻입니다. 그 부모가 이름을 지을 때에 이렇게 지었을 것입니다. 그 이름에 그들의 신앙이 담긴 모습을 봅니다. 물론 이름만 그렇지 전혀 그렇게 살지 못한 자들이 더 많습니다만 아마샤에게 영향을 끼친 예루살렘 출신의 왕후입니다. 왕의 공식에 그 어머니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그 어머니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3절입니다.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바른 왕의 기준은 항상 다윗입니다. 나쁜 왕의 기준은 여로보암입니다. 이미 여로보암의 죄에서 살펴보았습니다만 여로보암은 사람을 기쁘게 한 왕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함으로 자신에게로 힘을 모으려고 한 왕입니다. 그런데 다윗도 간음을 하고 살인을 한 왕이지만 그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제공함으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다윗이 이렇게 되는 것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을 통하여 여호와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기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마샤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다고 합니다. 요아스가 행한 일이란 이미 앞에서 본 대로 우상숭배입니다.

 

4절입니다. 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산당에서도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사무엘도 산당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삼상 9:12). 솔로몬도 산당에서 제사를 지냈고 여호와께서 그 산당에서 응답도 하셨습니다(왕상 1:2~5). 그러므로 산당에서 제사를 드려도 누가 어떻게 제사를 드리느냐에 따라 여호와께 드려지는 제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산당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제사를 드린다고 하여도 그 내용이 이미 이방의 사상으로 오염이 되어 있기에 산당은 혼합종교의 산실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좋아하는 종교행위를 하는 곳이 산당이기에 왕이 산당을 다 제거하면 왕을 지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사회적인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어떤 종교라도 허용이 되는 나라입니다. 돌에 빌던 사람을 추종하던 그 형태가 어떠하든지 나라와 사회에 해악이 되지 않는다면 허용을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기독교가 이 나라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해악을 끼치는 종교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미 대한민국의 근대사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천주교가 먼저 들어왔을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였습니까? 그들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독교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행사에 정치인들이 인사하려고 옵니다. 국가 조찬 기도회에 대통령이 기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인사를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한국교회가 힘이 있다고 좋아한다면 이것이 교회가 산당이 된 증거입니다. 교회가 정말로 성경의 말씀을 믿는다면 이 세상이 불에 태워져 사라질 것이라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이 지구 자체가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경제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의 문제가 아닙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것이라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가 세상의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세상의 자랑이 될 것들을 추구하고 있다면 이것이 혼합된 산당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된 곳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산당입니다.

 

북 이스라엘 왕이나 남 유다의 왕이나 산당을 없애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서 자신의 지위를 굳건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가 망하는 길입니다. 나중에 예루살렘의 성전까지 온갖 우상으로 가득 채우게 됩니다. 이러한 우상놀음이 오늘 이 시대에 없습니까? 도대체 왜 교회당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수많은 시간과 돈을 바치는 것입니까? 무엇을 얻기 위한 것입니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간 그 자기 부인의 길인 십자가를 지기 위한 길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조차 이용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교회당으로 몰려듭니까? 물론 지금은 급격하게 교인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교회들이 산당이 되어갑니다. 흩어지는 교인들을 붙들기 위하여 여로보암의 죄와 사울을 죄를 짓는 곳이 산당입니다.

 

5절입니다. 나라가 굳게 세워졌습니다. 나라가 굳게 세워진 것이 좋은 것입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굳게 세워진 것이라는 말씀이 무엇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까? 4절에서 산당들을 제거하지 않고 백성들이 여전히 산당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있다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그러면 나라가 든든히 세워졌다는 것은 아마샤가 백성들에게 인기 있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이제 백성들이 왕을 지지합니다. 이때 왕이 한 일이 자기 부친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습니다. 왕이 힘을 가지기 위하여 산당들을 제거하지 못한 것입니다. 산당을 제거함으로 백성들이 이탈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산당을 제거하지 않음으로 백성들이 왕을 추종하게 됩니다. 이제 왕에게 힘이 생겼습니다. 그 힘으로 자기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이것이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목사도 바른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 안에 산당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토요일 양산과 부산에서 세 분이 찾아왔습니다. 복음을 들은 지 1년이 되었다고 하면서 혹시 무엇이 필요한 것이 없느냐는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아무 필요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일학교도 제가 설교를 하니 재정이 어려워서 그런지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묻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부교역자를 둘 형편이 안 되어서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부교역자가 있어도 주일학교 설교를 하려고 생각을 합니다만 그래도 자족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혹 도울 것이 없겠느냐고 묻기에 예배당이 좁고 천정이 낮아서 이산화탄소가 빠져나가지 않으니 설교 후반부에는 교인들이 설교에 집중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배당 하나 지어달라고 했습니다. 저도 좀 괜찮은 산당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것을 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자기 아버지를 죽인 신복들을 죽였지만 그의 자녀들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모세의 율법대로 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24:16절입니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아마샤가 대단히 율법을 잘 지킨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쇼가 됩니다. 그 이유를 다음 절에서 보면 알게 됩니다.

 

7절입니다. 왕의 지지가 든든해집니다. 산당을 제거하지 않음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왕에게로 집중시킨 결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마음을 두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을 기르기 위하여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힘으로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일만 명을 죽이고 또 전쟁을 해서 셀라를 취합니다. 이렇게 이름까지 바꿈으로 자신의 행위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론 단어의 뜻은 하나님께서 정복하게 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이런 승리의 이면에 무슨 짓을 했는지 역대하와 함께 봐야 합니다.

 

역대하 25:5~16절입니다. “5 아마샤가 유다 사람들을 모으고 그 여러 족속을 따라 천부장들과 백부장들을 세우되 유다와 베냐민을 함께 그리하고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여 창과 방패를 잡고 능히 전장에 나갈 만한 자 삼십만 명을 얻고 6 또 은 백 달란트로 이스라엘 나라에서 큰 용사 십만 명을 고용하였더니 7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아마샤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이스라엘 군대를 왕과 함께 가게 하지 마옵소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곧 온 에브라임 자손과 함께 하지 아니하시나니 8 왕이 만일 가시거든 힘써 싸우소서 하나님이 왕을 적군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하니 9 아마샤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내가 백 달란트를 이스라엘 군대에게 주었으니 어찌할까 하나님의 사람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을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 하니라 10 아마샤가 이에 에브라임에서 자기에게 온 군대를 나누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니 그 무리가 유다 사람에게 심히 노하여 분연히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11 아마샤가 담력을 내어 그의 백성을 거느리고 소금 골짜기에 이르러 세일 자손 만 명을 죽이고 12 유다 자손이 또 만 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서 밀쳐 내려뜨려서 그들의 온 몸이 부서지게 하였더라 13 아마샤가 자기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돌려보낸 군사들이 사마리아에서부터 벧호론까지 유다 성읍들을 약탈하고 사람 삼천 명을 죽이고 물건을 많이 노략하였더라 14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1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한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시니 그가 이르되 저 백성의 신들이 그들의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 하며 16 선지자가 아직 그에게 말할 때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왕의 모사로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하니 선지자가 그치며 이르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

 

오늘 본문 7절을 역대하에서 이렇게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아마야가 힘을 얻었기에 부국강병책을 씁니다. 유대군사만 30만인데 여기에 북 이스라엘에 은 백 달란트를 주고 용병 10만을 고용하여 에돔을 치려고 갑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을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적들을 패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승리도 하게 하시고 패하게도 하신다고 하면서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미 용병의 비용을 주었는데 돌려받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자 여호와께서 그 보다 더 큰 것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아마샤의 속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체 군대를 양성 할 뿐 아니라 돈을 주고 용병까지 모아서 에돔을 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용병을 보냈는데도 선지자의 말대로 승리하여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오면서 무엇을 전리품을 챙겨옵니까?

 

대하 25:14절을 봅니다. 에돔의 신 그것도 유다에 의하여 패배한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한 것입니다. 이것이 산당종교의 모습입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분노하셔서 한 선지자를 보내어 책망합니다. 에돔 사람들 곧 세일 자손들을 왕의 손에서 구원하지도 못한 그런 신들을 섬기느냐고 책망을 하자 아마샤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미 산당을 없애지 않음으로 재미를 본 왕입니다. 왕이 힘을 가지고 되고 전쟁에서도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이 여호와의 도우심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책망하는 선지자에게 네가 왕의 모사나 되느냐며 그 말을 그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때리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선지자가 그 말을 그치며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도 산당들이 다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실 성전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 안에 산당들을 하나씩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산당이라는 것은 자아를 숭배하는 신전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마음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기를 위하여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를 와도, 기도를 해도, 찬송을 해도 자기를 위하여 합니다. 봉사를 하여도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헌신을 한다고 하여도 자기를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산당을 제거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산당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제거하여 주실까요?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이라면 이런 산당들을 무너뜨리십니다.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산당이 얼마나 뿌리 깊이 우리 안에 세워져 있는지 그런 책망을 우리가 싫어합니다. 아마샤의 아버지 요아서는 여호야다의 아들을 성전 뜰에서 죽여 버렸습니다. 아마샤는 선지자를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그치라고 합니다. 맞으려고 하면 계속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여호와께서 멸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다음 주에 아마샤의 결론을 보겠습니다만 오늘 우리 안에 산당이 무엇인지 말씀을 한 곳 보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6:12~20절입니다.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도는 우리의 몸이 산당이 아니라 성령의 전이 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와 합한 자들입니다. 주께서 우리 안에서 산당들을 무너뜨리시고 당신의 처소로 세워 가십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 되었기에 우리 안의 산당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이 땅에서 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붙으려면 우리가 땅에서 말씀의 검에 의하여 잘려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 붙여져서 그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진액을 공급받고 살아가야 함이 마땅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고이 단장하고 가꾸는 자아라는 산당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무너져 내릴 때에 세상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로 마음이 가게 됩니다. 이미 묵시 속에서 세상의 영광이라는 바벨론의 산당이 무너졌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