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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3:1~20 누구 때문에? 2016. 1. 10

 

오늘 우리와 열왕기서의 시간적인 간격이 무려 28백년입니다. 이렇게 오래된 구약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왜 봐야 하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0:11~12절입니다.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구약의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의 본보기가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오래된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어떤지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 여호사밧 때문에 엘리사가 기도를 해서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착하게 살아서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덕을 보는 사람이 되자는 식으로 많이 들어왔습니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모든 성경이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엘리사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시고자 하시는지 그 하나님의 뜻을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3:1~3절입니다. “1 유다의 여호사밧 왕 열여덟째 해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열두 해 동안 다스리니라 2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 3 그러나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여호람은 아합의 아들입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어 2년을 다스리고 죽는데 그의 죽음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동생 여호람이 왕이 됩니다. 여호람이 왕이 될 때는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 18년째입니다. 여호람은 이스라엘을 12년 동안 다스리는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 부모 곧 아합과 이세벨 같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보시기에 이런 말씀을 주의하여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는 관점이 우리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여호와 보시는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여호람이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습니다. 대단한 개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신전을 세웠지만 그 이름은 무엇으로 불렀습니까?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쪽의 성전과 비슷하게 지은 것입니다. 제사장도 세우고 제사도 드립니다. 이름도 여호와를 부르고 그 절기도 남 유다와 비슷하게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죄가 됨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은 여호와를 섬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람은 무슨 일인지 아합이 세운 바알의 주상까지 없앴습니다. 그러므로 남 유다의 여호사밧이 여호람을 좋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청소를 할 때에 쓰레기를 어디에 버립니까? 어제 교회 화장실 창고의 쓰레기를 버렸습니다. 우리 눈에는 깨끗해 보이지만 그러나 이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쓰레기를 치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보시면 우리의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 과연 보시기에 선한 것일까요? 나는 절에 나가지 않고 성당에 나가지 않기에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골로새서 3:5절에 보시면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람이 바알의 주상을 없앰으로 사람들은 좋게 볼지 모르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악입니다.

 

본문 4~7절입니다. “4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5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6 그 때에 여호람 왕이 사마리아에서 나가 온 이스라엘을 둘러보고 7 또 가서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하는지라

 

모압왕 메사가 아합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왕을 배반합니다. 1절에 모압 왕 메사라고 하는 이름이 유물로 발굴이 되었습니다. ‘18688월 사해동쪽 디본이라는 유적지에서 유물이 하나 발견 되었는데 흔히 모압 돌(The Moabite Stone) 혹은 모압왕 메사의 명각이다. 거기에는 이스라엘 왕 오므리가 오랫동안 모압을 지배하였으며 그의 아들(아합)도 상당기간 모압을 지배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내용에는 이스라엘을 자신이 자신의 신의 도움으로 무찔렀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여호람이 모압의 배반을 묵과할 수가 없어서 온 이스라엘을 둘러보았습니다. 이것은 군대를 모집한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도 사신을 보내어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자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이 내가 올라간다고 하면서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여호사밧이 여호람의 아버지 아합에게도 한 것입니다. 이로 보건데 아합이나 여호람 당시에는 북 이스라엘이 남 유다보다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결혼을 통한 동맹관계도 있습니다만 북의 아합이나 여호람 보다 경건한 여호사밧이 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열왕기상 22:4절입니다.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냐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아합과 함께 이 전쟁에 나갔다가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그 아들이 모압을 치러 가자고 하니 똑 같은 말을 합니다.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한 것은 사돈이라 거절 못한 것도 있었을 것이며 또한 군사적인 힘도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합의 아들에게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여호람이 바알의 주상을 없앤 것을 보고 같은 신앙으로 보고 동의하였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이 교회 다닌다고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같은 신앙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하다가 보면 이것은 분명히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틀렸다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것도 잘 아는 사이라든가 친인척의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이 믿는 것이 틀렸다고 하면 당신이 뭔데 잘난 체 하느냐는 반응이 옵니다. 그러면 딱히 할 말도 없고 해서 그냥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하면서 넘어갑니다. 전에 제 처조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상견례를 하는데 이모부도 꼭 오라고 해서 따라갔습니다. 저는 복음 이야기를 하는데 그 쪽은 기도를 많이 쌓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조카를 자기 딸의 신랑감으로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거 뒤집어 버릴 수도 없고 어떻게 합니까? 그냥 마치고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8~12절입니다. “8 여호람이 이르되 우리가 어느 길로 올라가리이까 하니 그가 대답하되 에돔 광야 길로니이다 하니라 9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가더니 길을 둘러 간 지 칠 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10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하니 11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2 여호사밧이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하는지라 이에 이스라엘 왕과 여호사밧과 에돔 왕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

 

여호람이 여호사밧에게 어디로 올가 가는 것이 좋으냐고 할 때에 에돔 길로 가자고 한 것입니다. 에돔이 유다의 지배아래 있으니 함께 동맹하여 가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연합군이 모암을 향하여 에돔 광야 길로 들어섰는데 7일이 지나자 군사와 가축이 마실 물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슬프다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세 왕을 불러 모압 왕의 손에 붙이려고 한다고 합니다. 여호람도 무슨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겉으로는 여호와 신앙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바알의 주상 없이 한다고 그 마음이 주께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 마음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지만 속에는 여호와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모습입니다. 아무리 여호와를 부르고 바알의 주상을 무너뜨려도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때 여호사밧이 여호와께 물을 만한 선지자가 없느냐고 묻습니다. 아합 왕과 연합할 때는 미리 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호사밧도 묻지 않았습니다. 이미 여호람이 결정하고 통보한 식이 되었기에 여기에 가타부타 말을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제 위기에 닥치자 여호사밧이 선지자를 찾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왕의 신하가 엘리사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세 왕이 엘리사에게 내려갑니다.

 

본문 13~14절입니다. “13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하니라 14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합니다.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 가라고 합니다. 이때 여호람이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모압의 손에 넘기려고 한다고 합니다. 여호와께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임의대로 전쟁하려고 와 놓고서는 여호와를 들먹이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이미 여호람이 어떤 신앙인지를 알기에 이렇게 책망을 합니다. 그러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기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 여호사밧이 경건하였기에 여호사밧의 얼굴을 보고 여호람을 위하여 기도하여주고 또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였다고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여호사밧이 그런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합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아들 여호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남 유다의 백성과 군대와 말들이 여호와의 것이지 어떻게 온갖 우상숭배를 하는 북 이스라엘 왕의 것과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남이가 하는 것이 통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우리교회를 나오고 부인이 다른 교회를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 그런 분도 계시는데 결국은 부인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왜 그럴까요? 다 같은 하나님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까? 아니면 부인이 하나님보다 더 세서 그런 것입니까? 도대체 여호사밧을 보고 기도를 하고 주께서 승리를 주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호사밧의 얼굴을 보고서 엘리사가 기도하여 승리하게 되었다는 식으로만 보았습니다. 이런 말이 잘 들리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무엇을 청탁할 때에 내 얼굴을 봐서라도 좀 해주라고 하는 말을 종종하고 살아갑니다. 분명히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도 사람의 얼굴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들어주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면 여호사밧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들어줄만한 사람입니까? 아합 왕과 전쟁에 나갔다가 죽다 살았습니다. 그 전쟁에서 아합은 죽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같은 싸움에 나가는 것입니다. 여호람이 바알의 주상 없애는 것 하나를 보고서 우리가 남이 아니라 같은 신앙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가 여호사밧의 얼굴을 보고 기도한다는 것은 결국 남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그 언약으로 인하여 지금 여호사밧의 얼굴을 보고 기도한다고 한 것이지 여호사밧 그 개인의 경건과 신앙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윗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서도 한 짓이 간음과 살인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사람의 입장에서 보려고 하지 말고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어떤 행위에 밑줄이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어떻게 보시는지에 밑줄이 그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15~20절입니다. “15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자를 불러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니 16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17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18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19 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읍과 모든 아름다운 성읍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하더니 20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엘리사가 거문고 탈자를 불러 오라고 합니다. 이것은 음악으로 분위기 고조하여 예언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교회든 어떤 선교단체이든 열심히 한다는 소문이 난 곳의 특징을 살펴보니 설교 후에 반드시 찬양을 하면서 기도와 결단을 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본 곳은 다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마치고 기도를 하면 벌써 찬양 팀이 나와서 찬양할 준비를 합니다. 분위기 맞추어 반주를 하고 기도를 하고 통성기도를 하면서 때로는 설교시간보다 더 길게 찬양을 하고 결단과 결심을 하게 합니다. 그러면 훨씬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엘리사도 그런 의미로 거문고 타는 자를 불러오라고 했을까요?

 

시편 150편입니다. “1 할렐루야.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하늘 웅장한 창공에서 찬양하여라. 2 주님이 위대한 일을 하셨으니,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더없이 위대하시니, 주님을 찬양하여라. 3 나팔 소리를 울리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거문고와 수금을 타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4 소구치며 춤추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현금을 뜯고 피리 불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5 오묘한 소리 나는 제금을 치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큰소리 나는 제금을 치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6 숨 쉬는 사람마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시편의 마지막 찬송이 할렐루야에서 할렐루야로 끝이 납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숨 쉬는 사람마다 주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사밧도 여호람도 숨을 쉬지만 여호와를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다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해결하려고 선지자를 찾은 것입니다.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물이 없어서 다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 찬양이 아니라 자기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여호와를 찬양하기 위하여 거문고 켜는 자를 부른 것입니다.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라고 합니다.

 

시편 22:1~5절입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편 22편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로 눈앞에서 보듯이 그리고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는 말씀이 바로 이곳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여호와를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정말 버림받는 그런 현장에서 찬송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면초가 현장에서 찬송을 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아도 버림을 받아도 주님은 찬송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수요일 욥기서에도 보았습니다. 주신이도 주님이시며 취하신 이도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복을 받았으니 화도 받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찬송입니다.

 

지금 엘리사는 이런 중에 찬송을 한 것입니다. 이때 여호와의 응답이 왔습니다. 시편 22:4~5절처럼 주를 의뢰함으로 구원을 얻고 수치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 응답은 물을 주실 뿐만 아니라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붙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여호람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모압을 징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일에 여호사밧도 에돔 왕도 합류를 합니다만 그러나 엘리사는 여호사밧의 얼굴을 보고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의 경건이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구 때문이냐고 물어봐야 합니다. 앞에서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의 얼굴을 보고 한다고 해서 여호람의 개인의 경건이나 권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면 조롱을 당한 선지자입니다. 그런 조롱당하는 자가 조롱한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구원의 소식을 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편 22:6~19절입니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와 에돔이 연합하여 모압을 치러 갔지만 물이 없어서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알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물도 주시고 전쟁에서 승리도 하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람 때문이 아니라 여호사밧의 얼굴을 보고 했다고 하지만 여호사밧도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런 응답이 주어진 것입니까? 이들의 죄로 인하여 대신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의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22편의 이 고난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버림 받으신 그 일로 인하여 죄인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행한 대로 주님께서 갚으신다면 우리는 날마다 저주에 저주가 더하여도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 더구나 우리의 죄가 어떠함으로 알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게 되는 일은 도대체 누구 때문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그 아들의 영원 전 언약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이런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의 영원한 찬송의 내용입니다. (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