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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9:15~18 엘리야니즘 2015. 10. 4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가 자신만 여호와 하나님께 열심을 내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 응답을 하시고 비가 오게 하셨는데도 하나님은 엘리야의 생각대로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자 자신만이 남았다고 하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합니다. 이것을 엘리야니즘말 할 수 있습니다. 이즘(ism)이란 ‘~주의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엘리야니즘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열심히 하는 것으로 자기주의를 주장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조금 더 확대하면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상입니다. 나만이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으니 나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만이 아니라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열심히 하지 않는 자기를 정당화하는 주의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자꾸만 고정화 되어가고 화석화 되지는 않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래도 나는 그렇지 않다는 자기주의가 나옵니다. 이런 자기주장을 저는 엘리야니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칠천 명을 남기신다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칠이라는 숫자는 언제나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완전하게 남기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남은 자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들의 특징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을 맞추지 않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바알이란 풍요와 다산의 우상입니다. 풍요와 다산에 무릎을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않고서 어떻게 풍요와 다산이 주어지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들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성경 몇 곳에서 남은 자가 어떤 자들인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열왕기하17:17~20절입니다. “17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1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노하사 그들을 그의 앞에서 제거하시니 오직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19 유다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관습을 행하였으므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을 버리사 괴롭게 하시며 노략꾼의 손에 넘기시고 마침내 그의 앞에서 쫓아내시니라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앗수르에 의하여 북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는 남기십니다. 그 이유는 다윗에게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 유다도 결국은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망하는 중에도 하나님은 자기 열심으로 이루어 내십니다.

 

열왕기하 19:30~31절입니다. “30 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31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이 본문은 나중에 다시 보겠습니다만 남은 자는 여호와의 일하심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스스로 남았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너 아니라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열왕기상 19:13~14절입니다.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엘리야가 이 말을 하나님께 두 번이나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무른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다음의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15~18절입니다. “봉독 엘리야 너 외에도 내가 칠천 명을 남기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시 이 길을 돌아가서 다메섹의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만 아니라 이방 나라 아람의 왕도 하나님의 도구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사엘이 다 못한 일을 예후가 할 것이며 예후가 다 못한 일을 엘리사가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엘리야니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미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슨 일이나 간에 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자기주장을 하게 됩니다. 고집을 부리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늘푸른 교회를 사임하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사임을 하면 시원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처음 오시는 분들은 그러면 안 된다고 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늘푸른교회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습니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한 두 사람이라도 복음을 듣고자 온 분들이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다만 내 생각뿐이라는 것을 엘리야를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의 일을 빈틈없이 이루어 가시는지 봅니다.

 

이사야 9:1~7절입니다.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호와의 열심히 이 말씀을 이루실 것입니다. 어떻게 이루어내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이루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스불론 납달리 이곳에 가셔서 복음을 전하신 것은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예수님의 행보였습니다.

 

마태복음 4:12~17절입니다.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이렇게 말씀을 찾아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 안에 영원 전 하나님의 언약과 창조와 구원과 심판과 종말의 모든 비밀들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여서 아무도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만이 십자가의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도 엘리야니즘이 나온다면 이 사람은 예수님의 되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엘리야니즘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나 나만이 이 일을 한다는 것은 전부 착각입니다. 모든 이단들의 주의와 주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들만이 온전히 성경을 해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가르침을 따라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내가 있음으로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 아는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17:1~8절입니다.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으려고 하였습니다. 왜 셋입니까?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시면 베드로가 두렵고 무서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놀라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구름 속에서 소시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두려워 엎드려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손을 되시면 일어나라고 하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제야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예수님만 보인 것입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인들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성경을 통하여 주님만 보이고 주님의 말씀만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