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7:1~73 문지기 2018. 5. 27

 

1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2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3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주민이 각각 자기가 지키는 곳에서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 4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성벽이 다 건축되고 문짝을 달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문을 지킬 문지기를 세웁니다.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이 레위 사람입니다. 레위사람들은 성전의 일을 돌보고 성전의 문을 지키는 사람들인데 왜 성문을 지키는 것입니까? 많은 학자들이 레위지파가 성문을 지키는 것이 아니기에 이 성경의 본문이 후대의 편집자들이나 서기관들이 삽입한 것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 13:22절을 보면 레위사람들로 하여금 몸을 정결하게 하고 성문을 지키게 합니다. 레위인이 성문을 지킨다는 것은 에스라 느헤미야 전체의 주제를 봐야 합니다.

 

에스케나지라는 사람이 에스라 느헤미야서에서 하나님의 집은 성전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와 예루살렘 성벽까지를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제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어 하나님의 집이 완공되었다면, 확장된 성전의 개념으로서 예루살렘 성벽을 레위인이 문지기로 지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봅니다. 이런 내용은 몇 번 언급한 김지찬 교수의 역사서 서론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전의 문지기라는 개념을 성경 전체로 확대하여 하나님의 집으로 보려고 합니다.

 

본문 1~4절을 봅니다. 성벽이 건축되고 성문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웁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일을 느헤미야의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로 세웁니다. 영문의 관원이라면 성전 문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냐라는 사람은 충성스러운 사람이며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 뛰어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일을 맡기면서 성문을 여닫을 때에 어떻게 할지를 말하고 또 예루살렘 주민이 각각 자기가 지키는 곳 곧 자기의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합니다.

 

5~7절입니다. “5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시므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6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와 각기 자기들의 성읍에 이른 자들 곧 7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아사랴와 라아먀와 나하마니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베렛과 비그왜와 느훔과 바아나와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명단은 에스라 2장에 나옵니다. 그곳의 명단과 이곳의 명단이 대동소이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다시 명단을 기록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벽과 성문의 건설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백성들의 명단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던 자들 중에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온 자들입니다. 이렇게 돌아온 자들은 자신들이 범죄 함으로 인하여 망하였다가 돌아오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남은 자들이며 이들이 하나님의 집이 될 사람들입니다. 신약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허물과 죄로 죽은 자임을 아는 자들이 주께서 돌이켜 주신 자들입니다.

 

8~60절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이 사만명이 넘지만 그 이름이 다 기록이 된 것은 아닙니다. 각 지파와 종족을 따라 대표자의 이름과 그에 속한 자들의 숫자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며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학이나 직장의 합격자 명단에는 관심이 있지만 이런 명단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찬송가 483장을 보면 주가 나의 이름 보좌 앞에 놓인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하셨을까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애굽과 바벨론이라는 세상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속 받은 자가 성전입니다.

 

61~65절입니다. “봉독 돌아온 자들 중에 그 족보가 불분명한 자들이 있습니다. 포로로 잡혀갔다고 돌아오면서 족보를 잃어버린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 중에도 명단이 불분명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판결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명단에 들어있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66~69절입니다. “66 온 회중의 합계는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67 그 외에 노비가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그들에게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사십오 명이 있었고 68 말이 칠백삼십육 마리요 노새가 이백사십오 마리요 69 낙타가 사백삼십오 마리요 나귀가 육천칠백이십 마리였느니라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의 명단과 짐승의 마릿수까지 적어 두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다는 것이 중요하기에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이름이 어디에 기록되는 것이 중요합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늘의 시민으로 기록되는 것이 영생입니다.

 

70~73절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이 성벽과 성문을 건축하기 위하여 헌신한 자들의 명단과 금액이 나옵니다. 족장과 총독과 백성들이 성벽과 성전을 짓는 일만이 아니라 성전을 위하여 제사장의 의복까지 드립니다. 이것은 강제한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드린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성벽과 성문이 완성이 되고 성전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게 됩니다. 1절에서 문지기가 나오고 73절에도 문지기가 나옵니다. 이 문지기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역대하 23:19절입니다. 또 문지기를 여호와의 전 여러 문에 두어 무슨 일에든지 부정한 모든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이 일은 여호야다 제사장이 요아스 왕을 세우는 상황입니다. 아달랴가 자기 손자들까지 죽이는 와중에 요아스를 여호야다의 아내이며 요아스의 고모인 여호사브앗이 숨기고 여호야다는 요아스를 성전에서 6년 동안 몰래 키워서 일곱 살에 왕으로 세우는 일에 문지기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느헤미야와 역대기를 보면 문지기의 일이 아주 중요하고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충성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하나냐 같은 자를 문지기의 일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지기가 좋다고 노래합니다.

 

시편 84:10절입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이런 찬송이 나오는 것은 주의 전을 얼마나 사모하면 이런 찬송을 하겠습니까?

 

시편 84편 전체를 봅니다. “봉독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하여 졌다고 합니다.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주의 집에 거하고 싶다고 합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은 항상 주를 찬송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소원하는 자들입니다.

 

어떤 분이 하도 남편이 애를 먹이니 정말 자기에게 잘해주는 남편이 있다면 하루라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런 남편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영원한 신랑이 있습니다. 하루 만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할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신랑과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여기서 미리 맛을 봐야 영원히 그와 함께 살 그 날을 좋아하고 사모하면서 주의 장막에 거하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게 하시기 위하여 진짜 충성된 문지기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1~6절입니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여기서 문지기가 나옵니다. 문지기가 목자입니다. 양들은 그 문지기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 갑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하기에 따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의 양의 문이라고 합니다(7). 예수님이 문지기정도가 아니라 아예 문이시기에 그로 인하여 구원을 얻고 생명의 풍성함을 얻습니다(10).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11).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주님께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을 것입니다(16).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으시고 얻을 권세도 있습니다. 그 목숨을 자기 양들에게로 버림으로 양들을 짊어지시고 자기에게로 이끌어 들이시는 분이 참으로 충성된 문지기이며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귀신들려 미쳤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양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양들은 늘 그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영원한 문으로 들어갑니다(24:7~10).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자가 없는 분이십니다(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