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3:1~32 성문과 성벽의 재건 2018. 4. 22

 

1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 31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 느디님 사람과 상인들의 집에서부터 성 모퉁이 성루에 이르렀고 32 성 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였느니라

 

3:1절을 봅니다. 그 때에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무너진 것을 조용히 돌아보고 나서 백성들을 모읍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선하신 손이 어떻게 자신을 도왔는지를 말합니다. 느헤미야의 말을 들은 자들이 모두 힘을 내어 성벽을 재건하려고 하는데 방해세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고 하면서 물리칩니다. 이러한 때에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형제들이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고 성별(聖別)하고 성벽을 건축하고 성별(聖別)합니다. 성별하였다는 것은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렸다는 말입니다. 왜 성문과 성벽을 성별한 것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성읍이기에 그 성 전체를 성별한 것입니다.

 

3:2~32절까지 봅니다. “봉독 문이 몇 개가 나옵니까? 3절의 어문, 6절의 옛 문, 13절의 골짜기 문, 14절의 분문, 15절의 샘문, 26절의 수문, 28절의 마문, 29절의 동문, 31절의 함밉갓 문입니다. 총 열 개의 문인데 양문에서 시작하여 양문까지 성문과 성벽을 재건합니다. 문의 이름들은 그 문의 기능들이 설명합니다. 양문이란 양들을 몰고 와서 성전에 제사하러 가기 위한 문이며 어문이란 물고기를 들여오는 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성문이란 사람과 물자의 출입을 합니다만 각 문의 주된 기능을 따라 이름을 붙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들 중에 신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은 양문뿐입니다(5:2).

 

온 백성들이 성문과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 자발적으로 힘써 일합니다. 느헤미야가 총독의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강제적으로 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성벽 쌓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5절을 보면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는 곳에서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사 담당자에게 협조하지 않는 자들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강제하지 않는 것은 예루살렘의 성벽과 성문이 성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것은 강제나 의무감이 아니라 은혜의 자발성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12절입니다. 예루살렘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딸들이 나섰다는 말이 없는데 여기서 딸들이 등장합니다. 5절에서 드고아의 귀족들을 마땅히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참여하지 않았는데 딸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았는데 이들이 나선 것입니다. 물론 여자들도 남자들을 도와야 성벽과 성문을 재건합니다만 이곳에서는 여자들이 앞장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직 성문과 성벽이 완성이 되려면 멀었습니다. 나중에 완성이 되고 봉헌도 합니다만 그 전에 오늘은 성문과 성벽을 재건하고 왜 성별하였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앞에서도 잠시 살펴보았습니다만 예루살렘의 성전을 싸고 있는 성벽과 성문이기에 거룩한 성으로서 성별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거룩한 성이라고 합니다(느헤미야 11:1, 18, 52:1, 9:24).

 

신약에서도 예루살렘을 거룩한 성이라고 합니다(4:5, 27:53). 그러나 이 거룩한 성이라고 하는 예루살렘 안에 있는 성전이 도적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3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2:19).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자신의 몸이 성전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심 이후로는 건물로 된 거룩한 성전이나 거룩한 성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가 성전입니다(고전3:16, 6:19). 그러므로 구약에서 성별한 예루살렘 성이나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을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만들어 내시는 참으로 거룩한 성전은 건축자들에게 버림받은 모퉁이 돌로서 세워집니다(118:22, 21:42, 4:11). 건축자들이 왜 돌을 버리는 것입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림받은 돌이 모퉁이 돌이 되어 지어지는 집이 사람의 보기에 신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20~22절입니다.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이 성전을 재건하고 성문과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장차 나타날 참된 성전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감으로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이키시고 성전을 재건하게 하시고 성문과 성벽을 재건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워지는 성전도 같은 원리가 적용이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돌입니다. 그 버림받은 돌에 마음이 가려면 자신도 여러 모양으로 세상에서 버림을 받아야 합니다.

 

저에게 여러 사람들이 연락이 옵니다. 연락이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말로 종교적으로 열심히 하던 분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한 후에 복음이 들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증거 한 그 터는 버림받은 돌,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붙어서 건물마다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지어집니다. 이것은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영이 임하여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시공간의 개념으로는 지어지기에 우리도 아직 공사 중입니다. 그러나 묵시적으로는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 완성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는다는 것은 그 완성 태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으로 인하여 비록 지금 내가 연약하고 자주 넘어지더라도 그리스도의 완성으로 인하여 쉼을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성된 것임을 사도들이 보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구약과 신약의 성전의 건물이미지로 새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이 어떤 모습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이 건물이 아니라 어린 양의 신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1~2절입니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새 하늘과 새 땅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신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물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1:9~14절입니다.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어린 양의 신부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어린 양의 신부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린 양은 일찍 당한 어린 양 곧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의 신부는 그의 피로 구속한 성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건물 이미지로 말하는 것이지만 구약이 그림자로서 신약으로 연결하여 보면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은 성도가 거룩한 성 예루살렘입니다. 그 성에 열두 문과 열두 기초 석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이름과 열두 사도의 이름입니다. 이 말은 구약과 신약에서 구원받은 모든 자들을 말합니다. 이어지는 열두 가지 보석들도 하나님께서 보배피로 구속하셨기에 보배가 된 자들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1:22절입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신부된 예루살렘 성 안에 성전이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어린 양이 성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양이 우리의 성전이 되시고 우리가 어린 양의 성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 내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겠다고 하시는 그 완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완성을 알고 믿는다면 이 날을 사모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아가 무너져 내리고 그리스도로 세워지는 일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됩니다. 느헤미야가 성문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이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에 참여되는 자들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마라나타를 말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