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17:1~19:3 400 1 2017. 9. 10

 

아사가 죽고 그 아들 여호사밧이 왕이 됩니다. 여호사밧에 대하여 열왕기보다 훨씬 많은 분량이 역대기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어떻게 부강하게 되는지를 언급하면서 두 번이나 북 이스라엘과 연합함으로 책망을 받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여호사밧이 부강하게 되는 것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다윗의 처음 길은 여호와만 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누구를 찾고 누구에게 구하여야 할지를 알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누구를 찾아야 할지를 알게 하십니다.

 

17:1~4입니다. 여호사밧이 왕이 되어 스스로 강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방어하였습니다. 여러 성읍을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다윗의 길을 행하였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였기 때문에 강하게 된 것입니까?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이렇게 되었습니까? 문맥으로 따라 보면 여호사밧이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킴으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내용을 해석하기를 우리가 조건을 갖춤으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면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사밧이 두 번이나 북 이스라엘과 연합하는 것을 보면 이렇게 해석 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여호사밧의 어떤 선행의 조건으로 강하게 되었다면 끝까지 그렇게 나가야 할 것인데 결코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북 이스라엘의 아합과 연합하여 전쟁에 나갈 뿐 아니라 아합의 딸을 자신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시킵니다. 아합의 딸이 아달랴입니다. 나중에 아달랴는 자기 아들이 죽는 것을 보고 유다의 씨를 말려버리려고 손자를 다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잘 섬겨서 여호사밧처럼 부귀와 영광을 누리자고 한다면 오히려 그 길이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5~9절입니다. 5절을 보면 그러므로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접속사는 여호사밧이 잘 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의 손에서 견고하게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무리가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림으로 그의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다고 합니다. 6절에서도 그가 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유다에서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방백들과 레위사람들과 제사장을 유다 성읍들에 순회하며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찾고 구하는 것이 여호와께 조건적인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그의 부귀와 영광이 최고에 달했을 때에 어떻게 되는지 보면 압니다.

 

10~1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다 사방의 모든 나라에 두려움을 주어 여호사밧과 싸우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이 예물과 조공을 드립니다. 여호사밧이 점점 강대하여 져서 요새와 국고 성을 건축하고 군대가 96만 명이나 됩니다. 이 정도의 군대는 정예병이 아니라 향토예비군을 다 포함한 숫자일 것입니다. 이렇게 강하게 되었을 때에 여호사밧이 어떻게 하는지 봅시다.

 

18:1절입니다.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여호사밧이 다윗의 초기 길로 행하였고 우상을 척결하였습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여호와를 찾았습니다. 이러한 일을 여호사밧이 잘한 일이라고 봅시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부귀와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귀와 영광이 크게 더하여 졌을 때에 여호사밧이 어떻게 합니까? 아합 가눔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이스라엘과 혼인동맹을 함으로 여호와만 구하는 길에서 떠난 것입니다.

 

열왕기하 8:16~19절입니다. “16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 오년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 17 여호람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통치하니라 18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가서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19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여호사밧이 자기의 아들 여호람을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러니 아달랴가 여호람을 우상숭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람이 이스라엘의 왕들의 길을 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의 길이란 우상숭배의 길입니다. 이러한 단초를 누가 제공하였습니까? 여호사밧이 부와 힘과 영광이 가득하였을 때에 더 큰 힘과 안정을 원하였기에 아합과 연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라를 멸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시겠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지 자신의 힘과 정치력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18:2~4절입니다. 여호사밧이 아합과 사돈이 되고 이년이 지나서 사마리아의 아합에게 갑니다. 아합이 극진한 대접을 하면서 길르앗 라못을 치자고 합니다. 길르앗 라못이 원래 이스라엘 땅인데 아람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이 나는 당신과 다름이 없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다름이 없으니 당신과 함께 싸우겠다고 합니다. 17:4절에서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다고 했는데 지금 여호사밧은 부귀와 영광이 크게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과 하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아합보다는 신앙이 있기에 여호와께 이 전쟁에 대하여 물어보자고 합니다.

 

5~8절입니다. 여호사밧의 요청으로 아합은 선지자 사백 명을 모읍니다. 여기서 거짓 선지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평소에 아합에게 좋은 말만 하는 궁중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이 한 목소리로 전쟁에 나가면 하나님이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붙이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이 미심쩍어서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합이 미가야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내게 대하여 좋은 일로는 예언하지 않고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여 그를 미워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사밧 왕이 그런 말을 말라고 하자 하는 수 없이 아합 왕이 미가야를 속히 오게 합니다.

 

9~11절입니다. 두 왕이 왕복을 입고 성문 어귀 광장의 보좌에 앉아있고 그 앞에서 사백 명의 선지자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시드기냐는 철로 뿔을 만들어 와서는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할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무기까지 지시하여 주셨으니 얼마나 분명한 응답으로 생각하였겠습니까? 다른 선지자들도 다 그와 같이 예언하여 승리한다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12~15절입니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미가야를 생각해서 말합니다. 다른 모든 선지자들이 왕에게 좋게 말하니 당신도 그들 중의 한 사람처럼 좋게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미가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기를 하나님의 말씀만 전한다고 합니다. 왕 앞에 도착하자 왕이 미가야 선지자에게 묻습니다.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물으니 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승리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조롱하는 말이기에 아합 왕도 알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만 말하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겠느냐고 합니다. 평소에 자기에게 좋은 말을 하지 않는 선지자가 자기에게 승리를 말하니 역시 믿어지지가 않아서 다시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미가야 선지자가 말합니다.

 

16~17절입니다. 선지(先知)자는 선견(先見)자이기도 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보고 온 미가야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다는 것입니다. 전쟁에 패배한다는 말입니다. 왕이 죽었기에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고 전합니다. 그러자 아합이 여호사밧에서 말하기를 저 사람이 내게 좋은 일로 예언하지 않고 나쁜 일로만 예언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미가야를 통하여 전쟁에서 패배할 것을 들었지만 미가야의 말을 무시하고 전쟁하려고 나갑니다. 자기에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사백 명이고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18~22절입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왕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천상회의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천상회의에서 천사들이 그의 좌우편에 섰는데 여호와께서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서 길르앗 라못에 가서 죽게 할까 하시니 여러 의논이 있은 후에 한 영이 여호와 앞에 나와서 자기가 하겠다고 합니다. 그 방법은 자신이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결과 지금 사백 명이 말하는 것은 결국 왕을 죽게 하려고 거짓말 하는 영이 임하여 그렇게 한 것이라고 전합니다. 이 말에 누가 가장 분노하겠습니까?

 

23~27절입니다.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치면서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고 합니다. 시드기야가 응답을 받았습니까? 받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응답을 받았기에 쇠로 만든 뿔을 들고 와서 이런 무기를 만들어 나가면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이 보다 더 분명한 응답이 없다고 자신하였는데 그런데 그것이 거짓의 영이 들어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그 확신은 사백 명의 선자지가 동일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미가야의 뺨을 때린 것입니다. 그때 미가야가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바로 그 날에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왕이 미가야를 잡아 옥에 가두고 자기가 평안이 돌아올 때까지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주라고 합니다. 목숨만 붙여두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미가야가 당신이 평안이 돌아오면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모두는 다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도 아합 왕이 전쟁에 나갔습니다. 미가야의 말보다 자기에게 좋게 말하는 사백 명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28~34절입니다. 아합 왕이 미가야의 말에 무언가 걸림이 있었든지 왕 복을 벗고 변장하여 전쟁에 나가고 여호사밧만 왕복을 입게 하여 나갑니다. 그런데 아람 왕이 병거 지휘관들에게 오직 이스라엘 왕하고만 싸우라고 특명을 내립니다.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이 아합 왕 인줄 알고 공격하러 왔는데 여호사밧이 놀라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여호사밧을 도우십니다. 적들을 감동시켜서 여호사밧을 떠나게 합니다. 그런데 어떤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변장한 아합 왕의 갑옷 솔기를 맞추어서 화살이 박힌 것입니다. 진중에서 나가려고 하여도 전쟁이 맹렬하여 저녁까지 버티다가 죽습니다. 역대기는 남 유다를 중심으로 기록하기에 아합에 대하여 더 이상의 기록은 없습니다만 그 병거에 흘린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게 됩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일에 대하여 엘리야가 저주한 대로 죽었습니다.

 

우리는 거짓말 하는 영에 대한 말씀이나, 아람 왕이 유독 병거 지휘관들에게 아합만 죽이라고 하였는지, 그 틈바구니에서 여호사밧을 공격하던 자들이 갑자기 감동을 받아 물러가는지, 우연히 쏜 화살이 아합의 군복 솔기를 꿰뚫어 맞춘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빈틈없이 일하고 계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심판할 자를 심판하시고 징계하실 자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한 사건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은 온전하게 자신의 뜻을 다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19:1~3절입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의 궁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평안히 돌아왔다는 것은 다치지 않고 돌아온 것이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죽기 직전에 여호와께서 적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여호사밧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중에 선견자 예후가 여호사밧 왕을 책망합니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할 것이라고 하시지만 그러나 왕이 우상을 없애서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을 찾았기에 그 정도로 용납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혼이 난 여호사밧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온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는 장면은 다음 주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하나 더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거짓말 하는 영에 대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여호와의 응답이라고 믿는데 그것이 속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짜 선지자 미가야의 뺨을 칩니다. 사람들은 다수 속에서 안전을 찾으려고 합니다. 민주주의도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다수라고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물론 소수라고 다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분별을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나옵니다만 나에게 좋게 말하는지 나에게 나쁘게 말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여기서 나쁘게 말한다는 것은 일부러 기분 나쁘게 한 말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것이 자기에게 기분 나쁘게 들리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9~12절입니다. “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를 심판을 받게 하시는 방법이 사단의 역사를 따른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임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자들이 구약의 시드기야와 사백 명이며 또 그 말을 듣는 자들도 그렇게 망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여호사밧은 식겁(食怯)을 하고 돌아오면서 책망을 받습니다. 식겁이 어감이 좋지 않아서 잘 사용을 하지 않았는데 사전적인 의미는 뜻밖의 일로 놀라서 겁을 먹은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여러 사람을 만나보면 참으로 여러 가지 종교적인 일에 빠져서 살던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한 마디로 식겁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식겁을 해서 복음이 들렸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또 어느 날 가면 다시 여호와의 언약을 멀리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여호사밧도 다음 주에 보면 또 다시 북 이스라엘의 아하시야와 동맹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경계하셔서 오늘도 인도하여 가십니다. 그 인도하시는 방법은 환경으로도 인도하시지만 일차적으로는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나에게 좋은 말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디모데후서 4:1~5절입니다.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자기 귀에 좋은 소리가 아니라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사도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는다고 하지만 역시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 담아서 복음이라고 합니다. 무언가 조금이라도 자기를 부인하게하고 부담되는 말이 있다면 그런 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내가 복음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수 속에서 안전을 추구하지 말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부인되어지는 지는 삶이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