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22:1~12 두 여인 2017. 9. 24

 

10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자기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국의 씨를 모두 진멸하였으나 11 왕의 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몰래 빼내어 그와 그의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게 하였으므로 아달랴가 그를 죽이지 못하였더라 여호사브앗은 여호람 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이더라 12 요아스가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전에 육 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

 

지난주에 본 말씀은 여호람이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그 언약의 내용은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등불이란 다윗의 왕위가 이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호람이 비록 악을 행하였으나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이러한 언약이 중요한 이유는 역대기 상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은 영원 전에 약속된 것이며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신 내용을 완성으로 보는 것이 신약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본문 22:1절입니다. 여호람이 죽고 그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됩니다. 아하시야는 전쟁에서 다른 형제가 다 죽고 혼자 남았기에 백성들이 아하시야를 왕으로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고 그 언약에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왜 적이 쳐들어오고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지 않고 세상의 힘이나 세상의 방법을 의지할 때에 언약의 저주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하는 길이 아니라 이렇게 해서 언약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택한 백성은 고난이 많습니다.

 

2~3절입니다. 아하시야의 어머니가 아합의 딸 아달랴입니다. 아달랴는 아하시야의 아버지 여호람의 아내였습니다. 여호람이 이 여인과 결혼하게 된 것은 아하시야의 할아버지 여호사밧이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달랴가 남편을 아합의 길로 가게 만들더니 자기 아들도 아합의 길로 가게 합니다. 우리나라 말에도 집안이 잘 되려면 며느리가 잘 들어와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남 유다에 북 이스라엘의 아합의 딸이 들어옴으로 삼대를 걸쳐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4~6절입니다. 아하시야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가 패망하게 하는 아합의 집의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3절에서도 보았습니다만 아하시야의 아버지 여호람의 아합의 길로 가게 하였는데 이제 자기 아들도 아합의 길로 가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 북 이스라엘의 요람과 연합하여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과 전쟁을 하였는데 요람이 부상을 당합니다. 그래서 아하시야가 요람의 병문안을 갔습니다. 이 길이 아하시야의 최후가 될 줄 몰랐습니다.

 

7~9절입니다. 아하시야가 요람에게 감으로 해를 입게 되는데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아합의 집안과 연합하는 것을 이미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하여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합의 집안과 끊어내지 못한 것은 그의 어머니가 아합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아하시야가 해를 입는 것은 예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예후가 아합의 집안을 심판하기 위하여 엘리사의 제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아합의 집안을 예후가 멸하는 때에 아하시야가 병문안을 왔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아합과 연합이 되면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된 지 일 년 만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예후가 아하시야를 장사지내줍니다. 시신을 장사지내지 않고 들짐승의 밥이 되게 하는 것이 엄청난 저주입니다.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 여호사밧의 아들이라고 하여 장사지냅니다. 손자인데 왜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히브리어 이라는 한 단어로 아들과 손자 후손으로 다 사용합니다. 아하시야가 죽음으로 아하시야의 집안이 약하여 왕위를 힘으로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10~12절입니다. 아달랴가 자기 아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유다 집의 씨를 모드 진멸합니다. 여호사밧이 며느리로 데리고 온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남편을 망치고 아들을 망치고 손자들을 진멸합니다. 그런데 여호람 왕의 딸 여호사브앗이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요아스와 유모를 자기 침실에 숨겨서 빼돌립니다.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누이이기에 요아스의 고모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것은 단지 혈육을 보호하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요아스를 숨긴 것을 아달랴가 알았다면 여호사브앗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브앗은 목숨을 건 것입니다. 그래서 요아스사 성전에서 6년 동안 숨겨서 키운 후에 8세에 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오늘 제목을 두 여인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여인은 유다의 씨를 말려버리려는 아달랴입니다. 어떻게 자기 손자들을 다 죽여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하는데 이세벨은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입니다. 그러므로 아합이 이런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건축하여 제단을 쌓고 아세라 상도 만들었습니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많이 죽였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이러한 이세벨은 세상의 나라 곧 짐승의 나라가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여인은 아주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요아스를 목숨 걸고 구하여 냅니다. 겉으로 보면 아달랴는 유다 왕조의 삼대를 걸쳐 전횡을 일삼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브앗은 단지 요아스를 구하여 낸 것만 기록이 됩니다. 누가 약속의 계통입니까?

 

창세기 3:15절에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며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쟁이 이미 창세기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창세기의 이야기는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이런 언약의 전쟁은 창세전에 이미 약속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중심으로 성경을 보지 못하면 우리도 이세벨처럼 자기를 위하여 남을 죽이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 남 유다의 씨를 진멸하려고 하지만 여호사브앗과 같은 여인이 유다의 씨 곧 아브라함과 다윗의 씨를 구하여 냅니다. 이것은 자신의 목숨보다 그 씨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계속됩니다. 이런 전쟁을 통하여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그리스도가 아기 예수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와 요셉을 피하게 합니다. 이러한 전쟁의 승리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십자가로 승리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실패로 보이는 십자가입니다. 세상은 십자가가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탄의 머리를 부수어버린 승리였습니다. 그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언약의 전쟁을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시각으로는 그 승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승리입니까?

 

히브리서 2:8~10절입니다. “8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2)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 유다의 씨를 진멸하려고 할 때에 목숨을 걸고 요시야를 숨긴 여호사브앗과 같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전쟁이 이미 십자가로 승리하였지만 히브리서 2:8절처럼 아직 만물이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만 이것을 받아들이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믿는 자들은 여호사브앗과 같이 그 약속의 씨를 품는 것을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 씨로 오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셨다면 이제 죽음의 종노릇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성도입니다.

 

빌립보서 3:17~21절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신랑만을 품지 않으면 그것이 음행이며 간음입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세상의 영광과 쾌락과 아름다운 것을 준다고 합니다(2:20). 이것이 바알과 아세라라는 우상숭배를 통하여 준다고 거짓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여인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그 약속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은 여인과 그 약속을 배척하면서 세상의 영광을 취하는 여인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한 여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마침은 멸망이며 그들의 신은 탐심이라는 배가 그들의 신입니다.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이세벨과 같은 여인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자녀는 하늘에 시민권이 있기에 땅을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여인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