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3:31~37 이름을 고쳐 2017. 2. 12

 

31 여호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삼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32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 33 바로 느고가 그를 하맛 땅 리블라에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또 그 나라로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고 34 바로 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그가 거기서 죽으니라 35 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로에게 주니라 그가 바로 느고의 명령대로 그에게 그 돈을 주기 위하여 나라에 부과하되 백성들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징수하였더라 36 여호야김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스비다라 루마 브다야의 딸이더라 37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요시야 왕의 개혁을 세 번에 걸쳐서 보았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사람이 요시야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시야의 이런 개혁은 요시야 왕이 태어나기 3백 년 전에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시야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도 그 말씀을 담고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의 죽음은 그야말로 허무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애굽의 왕이 바벨론과 전쟁하기 위하여 가는 길목을 가로막아 나섰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왕이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전하여도 요시야는 변장하여 나가서 싸우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죽은 것은 여호와의 은혜로 된 것을 자기의 힘으로 지키려고 하는 모습임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여호와께서 경영하시는 일에 자신이 가로막아 나선 꼴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십니다. 성도는 그 여호와의 하나님의 일하심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하면 자기부인을 당하면서 알게 됩니다.

 

창세기 28:20~22절입니다.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이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형이 죽이려고 하자 리브가는 자기 친정으로 야곱을 피난가게 합니다. 그렇게 도망가는 중에 들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땅과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가 보이고 하늘의 천사들이 그곳을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신 약속을 네게서 다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꿈에서 깨어나서 베게로 삼았던 돌을 취하여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서원한 내용이 오늘 방금 읽은 말씀입니다. 야곱이 이런 서원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야곱은 그런 믿음이 없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우니 여호와께 서원을 하며 자기를 지켜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까지 떠나지 않고 이루시겠다고 하신 말씀에 아멘하고 갈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받고서 20년이 지납니다. 아내를 위하여 14년 자신의 품삯을 위하여 6년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재산이 늘어나자 외삼촌과 외사촌들의 안색이 달라집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벧엘로 올라가는 중에 가장 큰 고비가 형 에서는 만나는 일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바뀌는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 그의 환도 뼈가 하나님의 천사의 의하여 침을 당함으로 평생 지팡이를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 에서를 만나서 화해하게 되고 그곳 땅에 머물다가 자기의 딸 딤나의 사건을 통하여 다시 벧엘로 올라가게 됩니다. 드디어 벧엘이 왔습니다.

 

창세기 35:9~15절입니다.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14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처음 벧엘에서 여호와의 언약을 받았을 때와 지금 언약을 확인하시는 것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신 결과를 확인당하고 있습니다. 이미 20년도 넘은 세월을 통하여 야곱은 자기 힘을 다하여 살아남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빈틈없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다시 벧엘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성전을 짓겠다는 약속과 십일조를 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와 기름을 붓고 밷엘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뿐입니다. 야곱의 서원이 없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자기의 꿈과 야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만이 자기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이제 하나님과 거래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욕망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약속이 담기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요시야에게서도 보고 악한 왕으로 평가되는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에서도 봅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보면 여호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23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3개월 동안만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하무달인데 립나 예레미야의 딸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와는 동명이인입니다.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3개월 동안 무슨 악을 그렇게 행하였겠습니까만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모든 조상들처럼 악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바로 느고가 그를 하맛 땅 리블라에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곳은 애굽왕이 바벨론과 전쟁하기 위하여 나온 왕의 막사가 있는 곳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리고 유다에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로 벌금을 내게 합니다. 바로 느고가 여호아하스 대신 왕을 세운 여호야김이 백성들에게 거두어 바로 왕에게 냅니다. 조공이 아니라 벌금이라고 한 것은 여호아하스가 반 애굽 정책을 펼쳤기 때문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요시야 왕이 애굽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자 백성들이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습니다(왕하23:30). 백성들은 요시야를 존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 이럴 때에 누구를 왕으로 세우겠습니까? 친애굽 성향이 아닌 반애굽 성향의 왕을 세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위 계승은 일반적으로 장자입니다. 그런데 여호아하스가 여호야김의 동생인데 동생을 먼저 왕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될 때 나이가 23세인데(31) 요시야의 다른 아들 엘리야김 곧 여호야김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25세입니다(36). 그러므로 여호아하스가 3개월 만에 왕에서 물러났으니 여호야김이 형입니다.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의 어머니가 다릅니다(31, 36). 그러므로 배다른 형제입니다.

 

바로 왕이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운 것은 친 애굽적 이기에 세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야김은 바로 왕이 벌금으로 부과한 것을 주기 위하여 백성들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징수하였습니다. 여호야김이 왕이 되어 11년을 다스렸지만 이 왕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입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의 원래이름은 엘리야김입니다. 바로 왕이 그 이름을 바꾸어 버립니다. 이것은 봉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름을 주는 자가 주인이며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왕이 이름을 바꾸어 버리는 것은 자신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자신이 신이 되려고 타락한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배를 만들고도 명명식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이름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름을 주신 분이실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을 새 이름으로 불러내십니다. 그 새 이름이 무엇입니까? 성도입니다.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무엇으로 구별하여 성도로 부르시는 것입니까? 지난주에 본 언약갱신 곧 유월절 어린 양의 피 아래 있는 자가 새 이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3:14~15절입니다.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바울사도가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서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합니다. 이러한 호칭 즉 이름을 주신 분이라는 말은 천지 만물의 주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천지 만물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를 부르는 자들은 그 이름의 비밀을 받은 자들만 압니다.

 

디모데전서 3:16절입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이 경건의 비밀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이 가장 큰 경건의 비밀입니다. 바로 왕도 왕을 폐하고 새로운 이름을 줍니다. 그런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사무엘하 7:11~17절입니다. “11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7 나단이 이 모든 말씀들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말하니라

 

다윗의 왕이 되어 백향목 궁에 거합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는 장막에 있습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에게 여호와를 위하여 집을 지어 드리려고 하였을 때에 나단 선지자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내가 어느 누구에게 집을 지어 달라고 했느냐고 하시면서 내가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후손을 말씀하시는데 그 후손이 일차적으로는 솔로몬입니다. 그 아들이 죄를 범하면 사사시대나 사울 왕과 같이 그 대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다윗의 후손들이 죄를 범하면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를 하겠지만 사울에게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하지는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호아하스나 여호야김도 다윗의 후손이기에 지금 사람의 매와 인생채찍을 맞고 있다는 것이 언약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의 일차적인 대상은 솔로몬입니다. 어떤 글을 보니 솔로몬도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우상숭배와 아내를 천명이나 둔 행태를 보고 말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인간도 구원에 이를 자가 없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언약 곧 그 아들의 희생을 통한 구원이지 우리의 행위를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죄 짓을 일에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자신의 죄가 어떠한지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어떠한지를 모르는 자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 22:10~11절입니다. “10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 11 여호와께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곳에서 나간 1)살룸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12 잡혀 간 곳에서 그가 거기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

 

각주 1)을 보면 왕하 23:30절에서 여호아하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상 3:15절을 보면 여호아하스가 요아스의 넷째 아들이며 살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아하스도 이름이 두 개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라고 합니다. 잡혀간 자를 위하여 울라고 합니다. 잡혀간 자란 바로 여호아하스입니다. 잡혀가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을 것이기에 그를 위하여 슬피 울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죽은 여호아하스는 다윗 언약으로 보면 어떻게 봐야 합니까? 사람의 매와 인생채찍을 받았기에 언약 백성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윗 언약도 문자적으로 보면 폐하여 진 것으로 봐야 합니다. 다윗의 왕조가 시드기야를 끝으로 끊어지고 바벨론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 이후로도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다윗 왕조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30~33절입니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다윗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로 인하여 영원한 성취가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 언약 하에 있던 왕들이 죄를 범하자 사람의 매와 인생채찍을 가하십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가기도 하고 이름이 바뀌기도 하고 포로로 잡혀가서 죽기도 하고 살아오기도 하지만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언약의 백성도 세상에서 버림받는 모습이지만 언약의 백성입니다. 이런 모습을 두 가지 면으로 보겠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는데도 고난 받는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악하게 산자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6:3~10절입니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복음 전하는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려고 정말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도 환난, 궁핍, 매 맞음, 갇힘, 난동, 수고로움, 자지 못함, 먹지 못함과 같은 일을 당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도들을 보는 시각이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복음을 바르게 받은 자들은 사도들의 이런 모습을 영광, 아름다운 이름, 유명함, 살아있는 자, 기뻐하는 자, 부요하게 하는 자, 모든 것을 가진 자로 봤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의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욕됨, 악한 이름, 속이는 자, 무명한 자, 죽은 자, 징계를 받는 자, 근심 하는 자, 가난한 자, 아무 것도 없는 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마음을 넓히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11~13절입니다. “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사도들의 모습을 겉으로 보면 도저히 받을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마음을 넓히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말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 옳은지 의심이 들 만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의 모습도 이런 징계 받는 자의 모습으로 죽임 당하는 자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데도 계속하여 여호아하스나 여호야김처럼 살아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윗의 언약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바울처럼 살아갑니까? 여호아하스나 여호야김처럼 살아갑니까? 여러분은 잘 모르겠는데 저는 여호아하스나 다음 주에 자세히 살펴볼 여호야김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것은 다윗 언약이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에게 적용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언약을 예수님께서 영원히 이루신다는 마리아의 찬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새 언약의 백성들이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살게 되는지 봅니다.

 

고린도후서 1:8~10절입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바울처럼 살든지 죽든지 주를 위하여 살아가는 자도 겉으로 볼 때는 죽는 모습으로 갑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팍팍 도와주시면 더 크고 멋있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제는 죽었다는 복창이 저절로 나오는 삶이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합니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해서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데도 이렇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 같은 사도도 순간순간 자기를 의지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 소망 까지 끊어지게 하심으로 주님의 약속만 의지하게 하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약속의 완성이신 십자가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1~5절입니다.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1)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신약에서도 원리는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많은 은사들이 나타나고 자랑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음행이 교회 안에 있는데도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러한 자들을 판단하였다고 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 주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난해구절이라고 하지만 여호아하스나 여호야김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왕이 폐위가 되고 다른 나라에 잡혀가서 죽임을 당하지만 그러나 다윗 언약에 속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음행하는 자를 사탄에 내어준다는 것은 교회에서 출교를 당하든지 병이 들어 죽든지 해서라도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죽여서라도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십자가에 함께 못 박아 죽이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언약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끌려들어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