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3:15~17 야긴과 보아스 2017. 6. 25

 

15 성전 앞에 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높이가 삼십오 규빗이요 각 기둥 꼭대기의 머리가 다섯 규빗이라 16 성소 같이 사슬을 만들어 그 기둥머리에 두르고 석류 백 개를 만들어 사슬에 달았으며 17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2)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3)보아스라 불렀더라

 

오늘이 무슨 날이지요! 한국전쟁 기념일입니다. 한국전쟁을 목격한 사람들은 전쟁의 비참함을 압니다. 전쟁의 무서움을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웹툰에서 잘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주인 공 중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일제 앞잡이로 살다가 해방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일본 앞잡이가 된 것을 알아보고 말하는 사람을 살인도 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한국전쟁이 일어나 폭탄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몸으로 느끼는 것이 오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총이나 포탄은 별 느낌과 감정도 없이 수백 명 수 천 명을 죽일 수 있다고 하는 말을 합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가 우리나라입니다. 다만 남한과 북한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변 강대국과의 이해관계로 얽혀있습니다. 북한의 재래식 무기는 한국의 최신식 무기를 당할 수가 없다고 북한에서 대위로 있다가 탈북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핵무기 개발에 온 힘을 쏟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국도 사드를 배치하고 미사일을 실험하여 우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대한민국에 속한 사람은 대한민국의 영원함을 바랄 것이며 북한에 속한 사람이라면 북한의 영원함을 기대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이나 남한이나 간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성도라면 영원한 나라를 받았기에 이 세상의 나라를 상대적으로 봐야합니다. 내가 대한민국에 속하여 있기에 대한민국이 진리라고 하면 안 됩니다. 대한민국도 얼마든지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나라에 피해를 줄 수 있는 나라입니다. 국익을 위하여 월남전에도 참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월남전 참전하여 부상을 당한 군인의 보상금을 국가가 십분의 일만 주었다는 것이 미국의 자료에 의하여 밝혀졌습니다. 또한 국가가 담배를 판매합니다. 보건복지부는 담배 피우지 말라고 광고합니다. 오전에 본 대로 이런 나라가 짐승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상대화 시켜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성전 앞의 두 기둥입니다. 놋으로 만들고 기둥머리는 각양 장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이름이 야긴과 보아스입니다. 오늘은 이 야긴과 보아스의 내용만 살펴보겠습니다. 야긴은 저가 세우리라입니다.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전 앞에 이 두 기둥을 생각해서인지 좀 규모가 있는 예배당을 지을 때에 예배당 정면에 둥글고 큰 기둥을 세워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 두 기둥이 무얼 말합니까?

 

성경에서는 둘이 등장하면 증인을 말하기도 합니다. 홀로는 증인이 될 수가 없고 둘 이상이 되어야 증인이 됩니다. 그러면 성전의 건물 앞에 이런 두 기둥은 그 이름이 말하는 대로 저가 일으켜 세우며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가 일으켜 세우리라고 하고 그에게 능력이 있다고 한 두 기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성전을 세우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성전과 기 기둥조차 바벨론에 의하여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가 일으켜 세우며 어떻게 그에게 능력이 있는지를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앞에서 한국전쟁에 대하여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 당시의 사진을 보면 정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현실을 본 사람은 지금의 한국을 보면 놀랍니다. 그래서 한강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기적이 계속하여져서 더 영광스러운 나라가 되고 세상 최고의 나라가 되어 영원하게 될 것을 희망합니다. 이런 방향으로 가는 것이 모든 국가들의 이념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앞에 세워진 기둥의 이름처럼 그가 일으켜 세우고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어떤 사람을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무너진 가정을 일으켜 세우며, 회사와 교회와 나라를 일으켜 세울 능력자가 올까를 생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자기 나라를 일으켜 세울 능력자를 늘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면 그가 일으켜 세운다는 단어가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표현들이 가장 많습니다만 인간이 우상을 세우는 것도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인간이 세우는 것이 무엇인지 하박국 2:12절을 보면 피와 불의로 성읍을 건축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세운다는 것은 피와 불의로 세우는 것입니다. 타락한 이후의 인간이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손들이 성을 쌓고 무기를 개발하여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가인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기에 세상 모든 나라가 부국강병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읍이 피와 불의로 세워지는 성읍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땅을 바다위에 세우시는 분이십니다(24:2). 하늘을 세우십니다(3:19). 보좌를 하늘에 세우십니다(103:19). 공의를 세우십니다(99:4). 사실 모든 만물이 주님에게서 나왔기에 주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세우심을 거부하고 쫓겨난 자들이 하는 일이 자기들의 이름과 자기들의 흩어짐을 면하려고 바벨탑을 쌓은 인생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흩어버리셨습니다. 언어가 왜 달라졌는지 그 기원을 말하는 기록은 성경이 유일합니다. 이렇게 흩어진 인간들이 다시 문명을 건설합니다. 그렇게 견고하게 세워서 어떻게 말하는지 봅시다.

 

에스겔 28:1~9절입니다.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3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4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5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하였으니 7 그런즉 내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니 그들이 칼을 빼어 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며 네 영화를 더럽히며 8 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를 바다 가운데에서 죽임을 당한 자의 죽음 같이 바다 가운데에서 죽게 할지라 9 네가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들 앞에서 사람일 뿐이요 신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세워가는 결국이 이 모양입니다. 나는 신이라는 자리에 앉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의 무엇을 허무는 자는 싫은 것입니다. 나의 재산을 손대는 자를 가만히 두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자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기에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면 가만히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타락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두로 왕의 모습이 내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두로 왕을 심판하십니다. 심판 당하여 죽임을 당할 때에 그 때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이방 나라의 교만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말씀은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에스겔을 통하여 너희가 멸망한 이유를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성전 기둥을 야긴과 보아스라고 하였지만 너희는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지 않았다는 책망입니다.

 

시편 39:1~7절입니다.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자신의 종말과 연한이 어떠함을 알게 해 달라고 합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 일생이 한 뼘 밖에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인생이 무엇을 세워서 든든하게 섰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허사뿐입니다.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도라면 내가 든든히 서고자 한 나의 존재기반으로 여긴 것들이 다 쓸데없는 것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소망을 흔들리고 무너질 터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우리의 전부를 세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과정이 성도에게서는 세상의 믿던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게 합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동안 만나본 많은 사람들 중에 그래도 십자가의 복음이 귀에 들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견고하게 여기던 것들이 흔들리고 무너진 자들의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건강이던 명예이든 교회의 직분이든 간에 무너져 내려야만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바라봅니다.

 

시편 75편입니다. “1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1)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2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3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4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5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6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7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8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9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10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들이 교만하고 자기를 높이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 심판이 일어나는 자들은 성도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아닌 자는 이 역사 속에서 심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혹 무너져도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면서 일어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미 완료된 십자가의 이루심이 임하였기에 헛된 것에 목숨 걸지 않습니다. 악인이란 결국 교만하여 자기 스스로 든든히 서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시편 90편에서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주님임을 먼저 찬송한 후에 우리 인생의 허약함을 말합니다. 우리 인생이 땅의 티끌이라고 합니다. 천년도 주님 앞에서는 밤의 한 경점과 같습니다. 아침이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버리는 인생이라고 합니다 . 저는 이런 말씀들을 볼 때 마다 인생이 가벼워집니다. 새털처럼 가벼워집니다. 별것 아닌 인생이 끙끙거리고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헛된 일에 바쁘게 살아 갈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인문학자는 재벌을 골탕 먹이는 일을 적게 벌고 적게 쓰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문학자보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말씀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성경의 말씀을 믿습니까? 시편 40편과 90편의 이 두 말씀만 믿어도 홀가분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시편 90:17절을 봅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2)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땅의 티끌이며, 들풀과 같은 인생이며, 한 뼘 길이만한 인생이며, 호흡이 그 있어 수에 칠 가치조차 없는 인생이며(2:22), 저울에 달면 입김 보다 가볍고 속임수입니다(62:9). 이런 인생들이 세운 것은 다 허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면 우리의 손으로 행한 것을 견고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헛된 일에 분요하지 않고 헛되지 않는 일을 행하게 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주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만 견고하게 세워지는 것이지 그 나머지는 다 무너지는 티끌입니다.

 

시편 127:1~2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오늘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세우려고 합니까? 야긴과 보아스는 사람의 손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손을 빌려서 세워진 야긴과 보아스는 바벨론에 의하여 놋 조각으로 부수어져 바벨론에 옮겨가 버렸습니다.

 

열왕기하 25:13~17절입니다. “13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14 또 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15 시위대장이 또 불 옮기는 그릇들과 주발들 곧 금으로 만든 것이나 은으로 만든 것이나 모두 가져갔으며 16 또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받침들을 가져갔는데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17 그 한 기둥은 높이가 열여덟 규빗이요 그 꼭대기에 놋 머리가 있어 높이가 세 규빗이요 그 머리에 둘린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라 다른 기둥의 장식과 그물도 이와 같았더라

 

야긴과 보아스 그 뜻이 그가 일으켜 세우리라.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두 기둥이 바벨론에 의하여 조각나서 약탈당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그가 일으켜 세우고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재건한 스룹바벨 성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당시의 헤롯성전이 아닙니다. 이는 이미 도적이 소굴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성전을 무너뜨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삼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일으켜 세우시고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룻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 무너졌습니다. 시아버지도 죽고 남편도 죽고 시어머니는 늙어서 아이도 낳지 못하기에 계대 결혼도 하지 못하는 완전하게 무너진 가정의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따라 옵니다. 그에게 능력자가 나타납니다. 보아스입니다. 빚을 갚자주고 원수를 갚아주는 고엘을 만났습니다. 보아스가 룻의 남편이 되었습니다. 그 족보를 따라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이것이 야긴과 보아스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이제 신약에서는 십자가로 확증해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1:17~23절입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떠한지 아십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쓰레기와 배설물로 보여주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합니다. 그런데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를 알도록 바울이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쓰레기와 배설물을 만지작거리면서 그것이 더 커지기를 원하신다면 정말로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우리에게 어떻게 베풀어집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가 참여됩니다.

 

에베소서 2:1~3절입니다.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1)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야긴과 보아스를 설명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가 일으켜 세우셔야 하고 그렇게 일으켜 세우는 분이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생명에는 관심이 없이 생존만 신경 쓰며 살았던 자들입니다. 거자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진노만 차곡차곡 쌓아가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분은 이 복음을 듣고 나서 남자가 두 달 동안 울고 다녔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4~6절입니다.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가 일으켜 세우는 야긴의 의미들이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말씀도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하늘에 앉히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죄인 된 자들을 구속하셔서 함께 살리시고 함께 부활시켜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이 보다 더 분명한 야긴과 보아스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가 일으켜 세우신 것이 그의 십자가로 자기 백성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리스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고 함께 하늘에 앉힌 자들이 성도입니다. 정말로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세상의 그 어떤 일들도 시시하고 가벼운 것들입니다. 크고 무거운 것 정말 영원한 것은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시는데 그 내용이 성도를 그 피로 일으켜 세우시고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유다서 24~25절입니다.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야긴과 보아스의 결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전능한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거침이 없게 하셔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분이 자기 언약에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