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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9:30~37 이세벨의 최후 2016. 07. 03

 

30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31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이르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하니 32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이르되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33 이르되 그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라 34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이르되 가서 이 저주 받은 여자를 찾아 장사하라 그는 왕의 딸이니라 하매 35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그의 손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36 돌아와서 전하니 예후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라 37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같이 밭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하였더라

 

같은 본문으로 지난주에는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세벨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겠습니다. 예후가 엘리사가 보낸 소년에 의하여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동료장군들이 예후를 왕으로 추대합니다. 왕의 입장에서는 반역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예후는 이미 엘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예언된 대로 왕이 되고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로 더럽혀진 북 이스라엘을 심판합니다. 예후가 요람을 죽이고 이스르엘 성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그런 와중에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내다봅니다.

 

본문 30~31절입니다. 이세벨이 예후를 향하여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고 묻습니다. 이미 예후가 반역하여 자기 아들을 죽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화장을 하는 이세벨이 어떤 여자인지 짐작이 됩니다. 죽는 순간에도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상숭배자의 음행과 술수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4:30, 23:40). 심판 앞에서도 멋있게 죽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후를 향하여 주인을 죽인 시므리라고 부릅니다. 예후도 시므리처럼 반역한 자라고 한 것입니다.

 

열왕기상 16장을 보면 북 이스라엘의 엘라가 왕이 되었을 때에 병거 절반을 통솔하는 지휘자 시므리가 엘라를 반역하여 왕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백성들이 오므리를 왕으로 세워 시므리를 칩니다. 시므리가 패배하자 왕궁에 들어가서 불을 질러 자살합니다. 시므리는 7일천하로 끝이 납니다. 이러한 시므리와 같은 자로 예후를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므리가 죽을 때에 또 백성의 절반은 디브니를 왕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결국 오므리가 승리합니다. 이 오므리가 이세벨의 시아버지입니다. 오므리의 아들이 아합입니다. 이세벨의 남편이며 그 아들 아하시야 그의 손자 요람까지 섭정을 한 이세벨의 최후는 개들의 밥이 되고 맙니다.

 

본문 32~37절입니다. 예후가 이세벨이 내다보는 그 창을 향하여 내편이 될 자가 누구냐고 하자 두어 내시가 예후를 봅니다. 예후가 그 내시들에게 이세벨을 내려 던지라고 합니다. 내시가 지금까지 이세벨의 말에 절대복종하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후의 말을 듣고서 그 이세벨을 창에서 밖으로 던져 버리니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었습니다. 예후가 그 시체를 밟고 지나가서 이스르엘 성에서 먹고 마십니다. 먹고 마시다가 이 저주 받은 여자를 찾아 장사하라고 합니다. 왕의 딸이기에 장사하라고 하였지만 그의 신하들이 나가보니 이미 개들을 시체를 먹어 버리고 두골과 발과 손만 남았다고 합니다. 이때 예후는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예후가 엘리야 선지자가 받은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21:23~26절입니다. “23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24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26 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엘리야가 이세벨의 최후를 말합니다.

 

열왕기하 9:7~10절입니다. “7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리라 8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9 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지라 10 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니 그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니라

 

엘리사의 사환이 이세벨의 최후를 예후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예후는 두 번이나 이세벨의 최후가 어떻게 될지를 들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이 저주 받아 죽었지만 왕의 딸이기에 장사 지내주라고 하였습니다. 이세벨은 시돈의 왕 엣 바알의 딸입니다. 왕의 이름에 아예 바알이 들어있습니다. 그 정도로 바알 숭배자의 딸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아합의 집안을 쓸어버려야 하는데 왕을 죽이고 왕의 태후를 죽이고 왕으로 등극하여 먹고 마시다가 자기 기분에 겨워서 그랬는지 왕의 딸이기에 장사를 지내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개들의 밥이 되어버린 후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세벨의 시체도 예후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됩니다. 이것이 이세벨의 최후의 모습입니다.

 

지난주에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북 이스라엘의 문제만이 아니라 남 유다와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까지 전부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가득함을 보았습니다.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 흉측하고 끔찍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매혹적으로 보인 것입니다. 이세벨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 사전에 찾아보면 정숙한 이라는 뜻으로 나옵니다. 얼마나 정숙하게 보이고 싶었으면 죽는 순간에도 눈을 그리고 머리를 다듬었겠습니까? 죽음 앞에서 비굴하게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단장한 후에 예후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면서 주인을 죽인 시므리여 평안하냐고 묻습니다. 이러한 이세벨의 음행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18~23절입니다.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009년에 요한계시록을 볼 때에 두아디라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세벨의 영이 어떻게 일하는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처음보다 나중에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에베소 교회보다 더 나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교회에 이세벨이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좋은 교회에 더 교묘한 거짓 선지자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인들이 이런 이세벨을 용납한 것입니다. 용납하였다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세벨을 받아들였을까요? 지금까지 두아디라 교회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처음보다 나중에 더 많았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할 때에 그들의 삶이 힘들었을까요? 평안하고 형통하였을까요? 정말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 교회에 이세벨이 와서 이제까지 여러분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많았으니 이제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풍요롭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말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야기 하는데 그 속에 바알과 아세라의 풍요와 다산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만이 아니라 이미 초대교회 때에 영지주의가 들어옴으로 영혼이 구원을 받았으니 음행은 죄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늘푸른 교회는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론과 지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말은 십자가, 복음, 자유를 말하지만 바알과 아세라가 주는 풍요와 다산이라는 세상의 재미들을 즐기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우리가 다 죄인인데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살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이세벨과 함께 음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이세벨에게도 회개를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세벨의 행위를 우리가 보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습니까? 대표적인 것으로 말하자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엘리야 선지자의 갈멜산 전투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그 선지자들이 다 죽임 당하였음에도 이세벨은 오히려 엘리야를 죽여 버리겠다고 합니다.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말하고 묵시와 역사를 말하고 십자가의 완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십자가로 완료된 사실을 믿습니까? 십자가로 완료되었다는 말씀은 십자가 밖, 곧 예수 그리스도 밖은 이미 죽은 세상입니다. 죽은 세상이기에 남은 것은 심판뿐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믿음이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하는 자가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향이 세상의 썩어지고 불에 태워질 것들로 가득하다면 그 사람은 이세벨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와 그 최후를 구약에서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이세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매력적이면 이렇게 사랑과 믿음과 수고와 인내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 나은 두아디라 교회가 용납하였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들은 우리들로 회개하도록 합니다. 회개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참여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처음 믿을 때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몇 십 년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알고 있다고 졸업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못 박힌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삶입니다. 날마다 도살당할 양처럼 죽음에 넘겨지는 자가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갈라디아서 2:20~21절입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자들이 이세벨의 미혹에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이세벨의 미혹에 넘어가듯이 바가모 교회는 니골라 당이 미혹합니다. 니골라 당은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라고 합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음행에 빠지게 하였듯이 지금 버가모 교회가 음행에 빠지는 것입니다. 버가모나 두아디라가 음행에 빠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의 자랑을 추구하게 하는 정신들입니다. 그러므로 21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은혜를 폐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세벨과 발람과 같은 자들의 교훈에 빠져서 음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17~22절입니다.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18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지난주에 다 보지 못한 부분입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허탄한 자랑을 하고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을 하는 자들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자들은 자신들의 의를 자랑합니다. 그런 것들이 허탄한 자랑입니다. 율법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을 따른 의로운 행위라는 것들도 단장을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복음을 듣고 겨우 피하였는데 이들을 다시 유혹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음란과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합니다. 이것은 영지주의의 유혹도 있고 세상의 번영신학의 유혹도 나옵니다. 금욕주의나 신비주의의 유혹도 나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에서 눈을 돌리고 마음을 돌리는 것이 전부 음행입니다. 이러한 이세벨의 미혹의 최후를 봅니다.

 

요한계시록 18:1~10절입니다. “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1)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1)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7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9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10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이 본문은 지난주에 찾아본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와 이집트과 앗수르와 바벨론의 멸망의 원인이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를 찾아본 내용의 결론입니다. 온 세상이 이 음녀 바벨론에 취하여 살아갑니다. 이것이 이세벨의 영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당연히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의 심판의 날에 갑자기 홀연히 멸망하게 되면 결코 다시 바벨론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 받은 백성들은 어떤 음성이 들립니까?

 

4말씀에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박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 음성이 들려서 그들에게서 빠져나온 자들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세벨의 음행, 바알과 아세라의 풍요와 다산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이 땅의 바알의 제단에서 벗어나는 것이 종말의 복입니다. 이미 성경은 이세벨의 최후를 이렇게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세벨의 음행에 동참하지 않게 되는 길입니까? 사람들이 싫다고 버린 십자가, 그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 이런 음행을 피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런 십자가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것들이 다 음행입니다. 이런 음행이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됩니다. 마치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눕는 것과 같은 짓들이 음행입니다. 이것이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들입니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눈과 마음에 밝히 보여 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