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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0장 무력(武力)대 지혜 2014. 10. 5

 

몇 주 전에 계략 대 계략에 대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무력과 지혜를 대비하여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도 대비를 통하여 변별을 하게 됩니다. 성경을 볼 때에도 이러한 대비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사울과 다윗, 다윗과 골리앗 등의 대비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어떤지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이러한 이야기의 대비만이 아니라 시편을 보면 같은 뜻을 다른 단어로 바꾸어 말함으로 그 뜻을 더욱 명확하고 풍성하게 합니다.

 

대비를 잘 나타내는 단어가 선악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왜 만들었느냐고 항의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하여서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면서 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자기 백성을 구하시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인도 사용하십니다. 잠언16:4절입니다.“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악인도 주께서 쓰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변의 악인들을 너무 미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떠한 자들인지 드러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들입니다.

 

1~2. 오늘 말씀은 다윗왕의 귀환이 일어나는 중에 다시 반역이 일어납니다. 지난주에 본 대로 다윗 왕의 귀환 시에 이미 백성들 사이에 요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의 종친인 유다지파에게 전갈을 보내서 자신을 왕으로 모시는 일에 앞장서게 함으로 오히려 다른 지파들의 반발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때에 반발세력을 이끌어 반역을 하는 자가 베냐민 지파의 세바입니다. 이 사람의 말로 사람들이 반역이 일어나는 것은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다윗에 대하여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세바에 대하여 불량배(不良輩)라고 합니다. 전에 성경은 난류(亂類)라고도 합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건달로도 나옵니다. 이와 같은 단어를 누구에게 사용하였는지 사무엘에서만 보면 엘리의 아들들(삼상 10:27), 사울의 왕이 됨을 비난한 자들(삼상 10:27), 다윗의 청을 거절한 나발(삼상25:17), 전쟁에서 낙오된 자들에게 전리품을 나누지 말자고 한 자들(삼상30:22)입니다.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 벨리야얄인데 무익하고 무가치하고 비열하고 사악하고 파괴하는 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윗을 반역하는 것은 다윗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언약을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함께 있다가는 우리가 아무른 분깃도 유산도 받지 못한다고 하면서 이스라엘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에 온 이스라엘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세바를 따릅니다. 유다사람들만 그들의 왕과 함께 요단에서 예루살렘으로 옵니다. 왕이 귀환 하는 중에 이미 반역이 일어납니다. 여기에 온갖 인간의 죄악들이 다 드러나고 있습니다.

 

3. 그런데 갑자기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겨 두었던 열 명의 후궁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평생 동침하지 않음으로 생과부로 지내게 됩니다. 왜 갑자기 이 내용이 들어있는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정들이 많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진 아내를 다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24:1~4). 더구나 레위기 18장에서 엄금하는 근친상간입니다. 그러나 열 명의 후궁을 성에 남긴 것은 다윗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내치지지도 못하기에 목숨을 부지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죄와 긍휼을 함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4~13.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아마사로 하여금 삼일내로 유다의 군대를 소집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시간이 촉박하여 지체가 됩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에서 경험한바 속전속결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아비새로 하여금 세바의 추격하게 하니 요압의 군사들과 용병들이 아비새를 따라 갑니다. 여기서 요압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혼란한 틈을 타서 요압의 권세를 제어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라는 말을 거역하고 압살롬을 죽인 것도 함께 염두에 두고 요압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아비새가 아니라 요압에게 명령한 것으로도 나옵니다. 어떻든 요압이 전쟁터에 나가는데 아마사가 맞이합니다. 좀 늦게 민병대를 소집하여 온 모양입니다. 그런데 요압이 그 아마사를 인사하는 체 하면서 칼로 찔러죽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이 군사령관으로 세웠는데 요압이 죽여 버립니다. 자기 친척이지만 라이벌로 등장하는 것을 제거하였습니다. 요압이 무력으로 행사하는 것을 봅니다. 11절을 보시면 요압의 용사 중 한 사람이 다윗보다 요압을 앞세우면서 요압을 따르게 합니다.

 

14~22. 세바가 요압의 추격을 피하여 이스라엘의 북쪽 끝 벧마아가 아벨이라는 성읍으로 피하였습니다. 이 단락에서는 다시 요압의 군대의 사령관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요압의 군대들이 토성을 쌓습니다. 이때 지혜로운 여인이 등장하여 요압에게 말합니다. 이 성읍이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아벨에게 가서 물으라고 하여 그 일을 끝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이 성읍에 지혜로운 자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읍에 수많은 지혜 자들이 있었지만 그 성읍에서는 온갖 모략과 권모술수가 난무하였습니다. 그래서 힘과 힘의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는 일이 되었습니다.

 

19~22. 19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 20 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 21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그의 이름을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그만 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 하니라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그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던지리이다 하고 22 이에 여인이 그의 지혜를 가지고 모든 백성에게 나아가매 그들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에게 나아가니라

 

무력으로 여호와의 기업을 지키려고 한 다윗과 요압을 다 치는 말씀입니다. 이름도 없는 지혜로운 여인이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느냐고 합니다. 어찌하여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느냐는 말입니다. 요압이 아주 당황하여 대답을 합니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고 두 번이나 말하면서 세바만 넘기면 이 성을 떠나겠다고 합니다. 이 여인이 그의 지혜로 백성들을 설득하여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지게 합니다. 지혜로 성읍을 구하였습니다. 이름 없는 여인의 지혜가 요압의 무자비한 칼을 이겼습니다. 또 지혜로운 여인인 아비가일은 다윗의 나발을 죽이기 위하여 달려갈 때에 그 앞에서 다윗을 막았습니다.

 

무력과 지혜를 비교하여 보면 지혜는 아무른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교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힘을 요구합니다.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요압의 정신입니다. 다윗도 이러한 모습이 말년에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를 계수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늘 추구하는 바가 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힘의 나라가 아니라 지혜의 나라입니다. 이 지혜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가 어떤 것인지 성경 두 곳을 봅니다.

 

전도서 9:13~18절입니다. “13 내가 또 해 아래에서 지혜를 보고 내가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14 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15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 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16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17 조용히 들리는 지혜 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18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솔로몬이 오늘 본문의 사건을 눈에 보듯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지혜 자가 무력을 이겨 그 성읍을 구원 하였지만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지혜가 힘보다 낫지만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사람들이 듣지도 않습니다. 조용히 들리는 지혜 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낫다고 합니다. 지혜가 무기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아벨 성을 구한 여인은 그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습니다. 힘이 통하는 이 세상에서 지혜란 이런 취급을 받습니다. 이런 지혜가 누구며 어떻게 일하시는지 아시겠지요!

 

열왕기상 19:11~12절입니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사르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아합의 왕궁도 그렇게 망하기를 기다렸는데 오히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인다고 하자 도망가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내용입니다. 바람과 지진과 불 가운데 계신 것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14~21절입니다.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요란한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투지도 들레지도 아무 소리를 듣지도 못하게 일하십니다. 이것이 지혜로 오신 예수님의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세상의 힘을 요구합니다. 그런 힘으로 무엇을 해 보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와 다른지를 보여주십니다.

 

야고보서 3:13~18절입니다.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두 종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로서 오는 지혜가 있고 다른 하나는 땅으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그 구분은 명확합니다. 세상의 힘을 원하는 곳에는 반드시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습니다. 시기와 다툼으로 교회의 일과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한다고 하면 이것은 세상 적이고 정욕의 것이며 귀신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로 독려하는 것은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온갖 혼란과모든 악한 일이 나타납니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라는 곳에 어떤 지혜가 있는지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땅의 지혜가 아닌 하늘로서 오는 지혜를 더하여 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윗의 힘이나 요압의 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다윗이 나중에 자기 군대를 계수하는 것이나 요압의 칼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지혜로 이루어 내시는데 이름 없는 여인의 지혜와 같은 방식입니다. 이러한 지혜로 일하시는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이며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로 보면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의 능력으로 믿는 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입니다. 반대로 자기 의와 자기 힘과 자기 능력을 믿는 자가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고전 1:1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