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사사기 13:1~7 잉태치 못하는 자 2013. 4. 21

 

여호수아 사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급속하게 타락해갑니다. 여호수아의 이름은 구원자입니다. 구원자가 없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사사기를 통하여 잘 보여줍니다. 구원의 공식처럼 된 배반, 징계, 부르짖음, 구원, 평안이라는 공식조차도 곧 무너지게 됩니다. 스스로 왕이 되려는 자가 일어나며, 스스로 구원자를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이제 마지막 사사로 등장하는 삼손의 시대에는 아예 적과의 동침을 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로도 평안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13: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이 ‘다시’라는 말은 늘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40년 동안 블레셋의 손에 넘겨주십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오랫동안 적에게 넘겨주신 적이 없습니다. 가장 긴 기간이 드보라 시대의 20년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시대에는 무려 40년을 적에게 넘겨주셨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3.2. 소라 땅의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노아의 뜻은 평안, 안식이라는 말입니다. 블레셋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평안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것은 노아처럼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시기를 바라면서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창5:29). 노아나 마노아는 그 어원이 같습니다. 히브리어로 ‘누하’입니다. ‘누하’는 휴식하다. 쉬다. 평안하다. 안식하다는 뜻입니다. 노아는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는 소망으로 이름을 짓습니다. 그런데 마노아는 지금 블레셋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 지배가 평안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사사기 15:9~13절을 봅니다. “봉독” 유다 사람들 삼천 명이 삼손을 잡아서 블레셋에 넘겨주기 위하여 온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블레셋의 지배를 받아 평안하게 사는데 왜 네가 나서서 소란스럽게 하느냐고 하면서 삼손을 잡아 넘기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가 생각나십니까? 하나님의 선지자자들을 죽이고 배척하는 이스라엘 전체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구원자로 나선 모세를 배척한 이스라엘입니다. 광야를 통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보다는 옛날 애굽의 종살이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곳의 고기 가마 옆이 좋았다고 합니다. 매일 하늘로부터 내리는 신령한 음식인 만나를 싫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결국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일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1:47~52절입니다.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로마의 지배를 평안으로 보고 예수를 죽이자고 합니다. 삼손을 적에게 넘겨주어 평안을 얻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24:1~9절입니다. “봉독” 로마의 지배를 평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전하는 이단이 나타났다고 고발합니다. 천하를 어지럽히는 전염병과 같은 자라고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세상의 평안을 원하는 마노아와 같은 사람들은 복음이 염병처럼 들리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잉태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모습니다. 도저히 진리의 말씀을 받아서 진리를 낳을 수 있는 자들이 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아내이고 여호와 하나님이 남편이신데 여자가 이런 모양이기에 잉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기에 잉태하지 못하는 여자로 하여금 잉태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잉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자식을 주시겠다는 말씀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다 비웃었습니다. 이미 경수가 끊어진 여인, 그곳도 결혼하여 수십 년을 살았지만 잉태하지 못한 여인이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이가 나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방식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나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통하여 인간의 불가능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자기 뜻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13:3~7.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이르시기를 네게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를 나실인으로 키우라고 합니다. 나실인은 여호와께 바쳐진 자를 말합니다. 나실인의 규례는 민수기 6장에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여호와께 자기 몸을 드리기로 서원하면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것은 어떤 것도 먹지 말 것이며 부정한 것에 접촉도 하지 말아야 하고 머리카락도 자르지 말아야 합니다. 나실인의 서원 기간이 끝나면 원래대로 돌아가지만 머리카락은 그때 다 밀어야 합니다. 그런데 삼손은 스스로 서원한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여호와께서 나실인으로 정하셨고 죽는 날까지 나실인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나실인으로 오신 분이 물론 예수 그리스도임을 미리 보여줍니다.

 

이사야 26:17~18절입니다. “17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18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해산의 고통 같은 고통을 할지라도 그 낳은 것은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구원을 베풀지 못하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다 고합니다. 이것은 사시시대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나타난 모습입니다. 해산의 수고를 하였는데도 바람을 낳았다는 것은 헛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33:11절과 59:13~15절에서는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하며 거짓말을 잉태하여 온갖 악을 낳았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잉태하지 못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어떻게 구원이 일어납니까?

 

이사야 54:1~10절입니다. “1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2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3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4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5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6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자에게 함과 같이 하실 것임이라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 7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9 이는 내게 노아의 홍수와 같도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하지 못하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10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로마서 4:1~25절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십니다. 17절을 봅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원래자리는 없음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성령이 임한 은혜의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의 있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없음이며 수고하여 잉태하여 출산 한 것이 바람이며, 겨와 짚이며, 거짓말임을 아는 자들이 주의 긍휼을 입은 자들입니다.